Text2022. 7. 2. 01:54

#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보니 전시가 끝나고 3개월이나 훌쩍 지났다. 2022년도 이제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구나. 6월엔 운전 연수를 받았다. 10년 간 운전대 한번도 안잡은 장롱면허였는데, 진짜 용기내어 해봤다. 역시나 운전은 나에겐 여전히 공포스러운 것... 그 공포를 이겨내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아 또 다시 자책감이 들었다.

# 올해의 개인전은 11번의 개인전 중에서 가장 준비가 어려웠던 전시였다. 돌된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겨두고 짬짬히 시간을 쪼개어 작업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끝나고 나서의 허무함은 예전보다 몇배나 더 컸다. 한점도 판매되지 않는 전시들이 수두룩빽빽이었지만 심리적으로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조그만 그림들이 여러점 판매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 이유가 뭐였는지를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붓을 들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캔버스 앞에서 붓을 손에 들기가 어려웠다. 뭔가를 계속 만들어야한다는 강박에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는 일을 하고, 생각을 비우는 연습도 하고, 독서모임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아가를 키우는데에 있어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 정말 실감한다. 요즘은 하루 중 낮시간에 특히 미친듯이 피곤과 졸음이 쏟아진다. 그걸 이겨내고 육아를 하면 밤에는 완전히 기절인데, 나는 꿋꿋하게 새벽까지 버틴다. 밤에 왜 정신이 또렷해지는지 나도 이유를 모르겠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아가는 너무도 반짝이고 예쁘다. 아기 얼굴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는 작업이고 일이고 시간관리고 내 체력이고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음. 너덜거리는 육체를 정신력으로 질질 끌고 버티면서 아기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정말 대단해서, 그 많은 일을 하고도 또 잘 버텨진다. 이런게 사랑의 힘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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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Text2022. 6. 16. 10:45

#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 당시 나를 참 좋아해줬던 제자와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좋은 선생 시늉을 하면서 뭐든 받아줄 것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해서, 될 수 없어서, 좋은 선생인 척 하고 싶었던걸까. 그랬지만 나는 결국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었다. 내 그릇이 이 정도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엔 큰 용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그 아이의 그늘을 지켜보며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나에게 화살로 돌아올땐 포용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다독이고 싶어도 다독여줄 수 없는 게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구나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주변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든 다 받아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여전히 좋은 친구이고 싶었던 내 욕심이 불러온 일들. 나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내 그릇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들켜버릴 때 오는 그들의 배신감과 허탈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너는 왜 내 기대에 부흥해주지 않느냐는 질타와 그때 넌 그랬지 하며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나를 미워했다던 말들. 모든게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그 폭력적인 상황들을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정말로 상대의 상처에 귀 기울일 수 없었다. 그게 내 그릇이었으니까. 이제야 이해한다. 나의 이런 빈틈마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남아있다는 것을. 그냥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알고 나에게 기대없이 사랑을 주는 이들. 그걸 느낄 때 나도 비로소 그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 내 주위엔 고마운 사람들과 좋은 음악이 있다. 인생 헛 산건 아니겠지. 나이 마흔에 되돌아 보는 아련했던 나의 그때 그 시절. 여유 없이, 허황된 목표를 세워가며 작업만이 전부인 줄 알고 열심히만 살아왔던 그 시절. 그때엔 그게 가장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니 그리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렇게 열심히 안 살아도 된다. 그냥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 흐린 아침시간이지만 아주 예전에 들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니 다시 행복해진다. 그의 음악에는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한 온기가 있다. 피아노 선율과 합처져서 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아침. 우리 아기의 꺄르르한 눈망울을 보며 작디 작은 고사리손을 잡고 걸을 때,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런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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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Text2022. 5. 19. 12:23

 

 

태반의 무게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프롤로그

죽음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문제의식을 주제화해 온 작가 서고운의 신작전이 열렸다. 이번 주제는 태반의 무게’! 이번 전시는, 서고운이 출산의 경험 이후 갖게 된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인식의 장이 펼쳐진다. 출산 직후, 미리 병원에 부탁했던 자기 태반을 받아와 살펴본 경험에 근거한 이번 전시는 태반이 지닌 따스한 온기와 미끈하고 물컹한 감촉 그리고 묵직한 무게로부터 추출되는 생명에 관한 작가의 사유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이전의 다루었던 죽음의 주제가 이번 전시에서 변모한 지점은 무엇이고 그 사유의 미학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II. 탄생 - 죽음을 여는 서막

 어떤 생명에게나 탄생은 죽음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것이라는 서술은 인생에 관한 가장 간명한 정의가 될 것이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내 의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삶이 지닌 아이러니다. 죽음이라는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죽음은 인류에게 필연이지만, 어느 누구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다. 즉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라는 주체가 늘 인식하는 간접 경험의 사건이다.

 생계에 허덕이던 이웃 독거노인의 처연한 죽음, 오랜 병마와 싸워온 한 친족의 안락사, 젊디젊은 한 청년의 교통사,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전쟁 속에서 사라진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이의 죽음의 사건들은 늘 살아있는 자주변에서 벌어진다. ‘살아있는 자우리라는 이름으로 죽지 않고 남겨져 있는 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여전히 달려가고 있는 현 상황을 공유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류에게 늘 화두였던 이러한 질문은 살아 있는 자를 늘 괴롭혀 온 주제이다. 생명을 잉태해서 세상에 내보낸 경험을 가진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사유의 전환점으로 맞닥뜨리게 한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는 나의 출생과 대비되게 나의 의도로 갖게 된 생명 잉태의 순간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나로부터 기인한 다른 생명에게 대하게 되는 일련의 책무와 같은 것이다.

 작가 서고운은 이러한 지점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본다. 출산 이전과 이후의 인식 변화, 그것은 나로부터 기인한 다른 생명의 문제에서 우리로부터 기인했던 무수한 생명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다. 즉 서고운은 내 아기를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아기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유괴 또는 아동학대로 버려진 죽은 아기, 전쟁의 포화가 야기한 아이들의 집단사와 같은 인간 죽음의 사건은 물론이고, 반려동물들의 처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이란 사건은 타자에게로 확장된다.

 작품 그들은 단지 아이들이었다서 서고운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잔혹한 참사들을 다루고 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무수한 희생자의 육신들, 그리고 그 뒤편에서 한 나신의 인간이 그 영령들을 기리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고 처연하다. 작품 애가를 읊조리며는 또한 어떠한가? 한 어머니가 아기를 포대기로 안고 있는 형상 주변으로 태반과 태아가 그리고 전체 이미지가 탯줄로 연결된 초현실주의적 풍경은 생명의 태동과 같은 감동 가득한 풍경으로 시작하면서도, 인간 욕망이 낳은 낙태, 사고가 낳은 사산(死産)과 같은 처참하고도 비극적인 결과를 한데 아우른다. 이처럼 생명이란 정녕 죽음의 무게 아래에서 납작 엎드려 숨을 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가?

 또 다른 작품, 작은 천사연작을 보자! 푸른 벨벳 천에 쌓인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육신 안에서 거주했던 세월을 마감하고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는 탄생의 순간을 거치며 비로소 세상과 마주한다.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존재로 모체에 있던 태아는 팔다리와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기관 있는 신체(corps avec organes)'로 인간 사회에 잠입한다.

 그런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죽음을 향한 여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작품 속에서 벨벳 천에 쌓인 아기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죽음을 향한 출발점에 서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탄생과 죽음의 접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완결한 존재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작품명처럼 어쩌면 이 아기들은 잉태의 순간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랑스러운 천사일 수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생을 다해, 육신으로 살아가지 못하지만 천사의 존재로 어머니의 마음속에 남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지 속 갓난아기의 생사 여부는 여기선 주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서고운이 작품 속에 담은 갓난아기는 그 자체로 세상을 품은 존재인 까닭이다. 붉은빛, 보랏빛, 초록빛의 발광체처럼 표현된 아기들은 대우주를 하나의 몸체에 담은 소우주로서의 인간이라는 아포리즘(aphorism)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처럼 간주된다. 출생이라고 하는 죽음을 여는 서막이 이토록 숭고하단 말인가?

 또 다른 작품에는 죽음의 극명한 이미지들이 있다. 마지막 숨연작을 보자. 수술 장갑을 낀 두 손이 수술 도구 위에 사산한 태아를 들어 보이고 있는 장면이나 맨손으로 사산한 것으로 보이는 태아를 받치고 있는 장면은 처연하다. 원 모양의 변형 캔버스에 담은 이러한 이미지들은 죽음을 애도하는 짧은 장례의 순간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모든 탄생의 순간에는 극도의 긴장이 오간다. 이 사건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III. 생명 -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

 삶과 죽음을 동시에 품은 탄생의 순간은 어머니 육신의 안과 밖에서 같은 듯 다르게 펼쳐진다. 어머니의 육신 안에서 태아를 키운 태반이 출생의 순간에 버려지듯이, 어머니의 육신 밖에서 인간의 죽음을 향한 노정중에 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또한 죽음의 순간에 버려지는 것들은 무엇일까?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는 죽음의 순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게 잉태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 삶의 과정과 죽음의 순간에 맞닥뜨리는 생명의 문제는 이제 물리적 육신이 품은 물질적 에너지의 유무에 관한 문제를 넘어선다. 사랑, 희생, 이타와 같은 추상의 담론이 우리에게 더 주요해지기 때문이다.

 작품 Connected 1Connected 2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당면한 물질적, 물리적 상황은 논외의 대상이 된다. 성인의 손과 그것이 맞잡은 아기 손을 표현한 이 작품들은 세월의 무게가 다른 두 인격체가 만나는 순간을 담는다. 아기에게 그 만남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그것은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 속에서 전혀 뜻밖의 것들이 잉태한다. 사랑과 희생 그리고 책무와 같은 추상적 관념이 그것이다.

 작품 트라우마 Trauma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 인간들은 인류의 존재적 상황을 표현한 아이콘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품명처럼 누군가로부터 태어난 나의 존재가 또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고 세상에 내보내는 가운데 어떤 트라우마처럼 인류가 지속된다는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즉 한 개체가 죽음을 향한 여정 속에서 맞닥뜨린 여러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지속된다는 이야기를 품어 안는 것이다. 세상에 나온 무수한 생명,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다른 인격체들의 만남, 그 사이에서 사랑과 희생 그리고 책임의 무게는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자와 나 사이에 벌이는 미움, 질시, 무관심, 방기, 폭력, 억압 같은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심지어 협박과 위해 그리고 살인에 이르는 사건들은 생명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생로병사와 같은 자연스러운 세월의 무게가 아닌 타자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세월의 무게는 생명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버겁게 만든다.

 이전 개인전에서도 선보였던 작품 원귀도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재등장하는 만큼, 작가의 입장에서 출산 전과 후에 변화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재성찰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화면의 전면 중심에 펼쳐진 붉은 천위에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신과 같은 육질의 덩어리가 자리하는데, 그것은 기생충이 자양분을 삼아 스멀스멀 자라나는 죽음의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 뒤편에는 사지가 절단된 남자, 끈으로 포박당한 여자, 온몸에 상처로 가득한 핍진한 표정의 여인 등 고통에 절규하는 인간 군상과 해골만 남은 인간, 춤추는 마귀의 형상이 엇갈리는 지옥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풍경이자 죽음과 삶이 겹쳐 있는 현실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지옥도와 같은 풍경 위로 기어 다니는 어린 아기의 하얀 실루엣 이미지는 죽음의 그림자 위에 삶이 겹쳐져 있는 현실을 되뇌게 하기에 족하니까 말이다.

 그렇다. 생명 가득한 현실의 삶에는 죽음이 함께 자리한다. 그런 면에서 현실 속 생명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匍越)하는 순간들이 여실히 지속되는 무엇이다. 포월이란 한자의 의미 풀이대로 기어서 넘는일련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현실 극복과 이탈을 주도하는 초월(超越)과 대립한다. 그것은 탈주의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초월과 달리 현실을 안고 엉금엉금 느리게 기어 넘는 지난한 넘어섬의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력과 같은 실천의 면모와 달리 필연적인 도래의 양상을 드리운다. 즉 포월은 현실을 사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노력보다 생명에 대한 필연적 양상에 대한 순응을 요청한다. 포월하기! 그것은 결코 나의 의지가 아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필연적 덕목인 셈이다.

 

IV. 에필로그 - 태반의 무게 혹은 사랑의 덕목

 인간 현실 속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벌어지는 시기, 질투, 모함, 사랑, 보살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인간 욕망이 촉발하는 결과물처럼 보인다. 죽음 앞에서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욕망이지만, 인간은 죽음을 달려가는 생의 순간들마다 이러한 욕망을 탐한다. 그 욕망이 야기한 무수한 결과 중 선보다 악에 가까운 많은 것들이 우리의 현실을 어지럽힌다. 사랑과 희망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을 매번 맞이하면서 살고 있는 현실 속 인간에게 타자를 사랑하고 타자에 대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란 내가 실천하는 의지이기보다 마땅히 그래야 할 필연적인 인간의 덕목인 셈이다. 어찌 보면 사랑이란 진화론적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고 하는 공생하는 인간이 지닌 덕목처럼 보인다.

 서고운이 출산 이후 펼치는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주제인 태반의 무게는 그러한 점에서 설명하기에 간단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그 메시지는 선명하다. 생명을 잉태한 인간 주체가 타자 앞에서 늘 생명 존중에 대한 책무를 다해만 한다는 작가의 결단과도 같은 이 주제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보편적인 인류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기하는 까닭이다.

 어린 아기를 무릎을 꿇은 채 품어 안고 있는 작품 포옹이나 아기를 품어 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 눈물로 품은 사랑연작은 이러한 차원에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되묻는다. 어머니의 모습은 자신이 자의로 잉태한 생명에 대한 아픔, 상처, 죽음마저 보듬어 안아야 할 사랑의 책무를 지닌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의 책무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으니절망을 마주하기가 선보이는 상징화된 이미지는 작품명에서처럼 절망의 어둠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는 어둠 속에서만 피어나지 않는다. 생명이라는 것이 죽음의 무게 아래 맞물려 있다고 보는 까닭일까? 서고운은 생명 탄생의 순간을 그린 작품 우리 모두, 우리 손으로 무너지기 전에!에서 생명 사랑과 그것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산고를 겪고 있는 어머니를 둘러싼 목각 인형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군상이 아기의 탄생 순간을 지키고 있는 장면을 선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장면 뒤로 거대한 손이 악귀를 퇴치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복잡다기한 화면을 통해 인간 생명의 지속성을 갈망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는다. 전시명 태반의 무게라는 것이 이러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와 같은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탄생이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의 출발점이다. 그런 면에서 탄생은 죽음을 여는 서막이기도 하다. 그러나 탄생으로 비롯된 생명은 죽음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생명은 죽음 이전까지의 지난한 과정이지만 죽음은 언제나 생명 주위에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가히 생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의 문제의식을 조형적으로 성찰하는 서고운의 이번 개인전은 출산 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반의 무게를 화두로 삼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랑의 덕목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선보인다. 따라서 그녀가 제시하는 태반의 무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죽음으로부터의 희망, 죽음으로부터의 생명을 견인하는 가장 큰 힘인 사랑을 통해서 측량될 무엇이라고 할 만하다.

 

 

 

 

 

감사합니다.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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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2021. 4. 14. 23:57

.

몸 건강, 마음 건강, 타인에게 피해 안 끼치는 삶, 긍정적인 삶, 소박한 삶, 즐거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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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2021. 3. 22. 12:41

# 나는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그림을 좋아한다. 익숙한 것 같은데 뭔가 익숙하지 않고, 자꾸 보다 보면 기이하고 불편한 지점에서 나름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그림 말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도 그런 작업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온전히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운 부분만을 표현하는 것만은 또 원치 않아서, 미와 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결국 매번 좌절하고 실패하면서 회화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 14년 전에 함께 작업실을 썼던 동료 작가가 얼마전 내게 말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가 함께 작업실을 썼을 때, 내가 알람을 맞추고 자다가 알람 소리에 깨서 수첩에다가 꿈에서 본 것들을 적던 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게 그림으로 그려졌다고. 그때를 생각하니 너무 좋다는 말도 함께였다. 나는 사실 지금도 꿈에서 본 것들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고 있다. 그런데 14년 전 내가 그렸다는 그 그림을 잊고 살다가 알게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의식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무의식은 전의식으로 넘어갔다가 어느 순간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그리려 했고, 그 이후에는 그 경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경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애도하다가 결국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죽음에 대한 전시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된 건 2017년 더 디바인 코미디 전시와 2018년 아웃랜더스 전시였다. 나의 작업적 계보는 이렇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리게 되었던 배경에는 감각의 무한한 겹들과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 나는 추상과 구상 작업을 구분하지 않고 좋아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 통해 무언가를 선동하려는 느낌의 그림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선동의 이미지, 교조적이고 계몽적인 이미지. 강해 보이려고 하는, 어쩌면 아주 강하게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의 작업들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담겨있지 않은 그림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결과물까지 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쏙 빠져있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간혹 그런 그림들 중에서 명화들을 가져와 손쉽게 형상화하고 그럴싸하게 보이게 현란한 붓터치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데(그런 그림들이 잘 팔린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은 그런 작품을 하는 작가가 나에게 '너는 그러지 않겠지만'이라는 말을 계속 던지며 비꼬듯 이야기하고, 자신은 200호를 하루에 다 그릴 수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을 때 정말 진지하게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의 입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정봉이가 귀를 막고 아아아아아 안들려어어어어 하는 장면이 있는데, 가끔 나도 실제로 그러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작품이 그저 하나의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되는 그런 지점을 너무 서스름없이 드러내는 화가의 얕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 작가는, 이미지를 감각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느낌대로 충실히 하면 된다. 그냥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 그만이다. 어제는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작업실에 나와서 계속 삽질만 하다 갔다. 어깨가 축 쳐졌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삽질이 어떤 결과로 드러날지 나조차 가늠이 안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질은 계속 될 것이다. 그렇게 매번 실패하며 더욱 더 작업을 놓을 수 없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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