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 당시 나를 참 좋아해줬던 제자와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좋은 선생 시늉을 하면서 뭐든 받아줄 것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해서, 될 수 없어서, 좋은 선생인 척 하고 싶었던걸까. 그랬지만 나는 결국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었다. 내 그릇이 이 정도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엔 큰 용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그 아이의 그늘을 지켜보며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나에게 화살로 돌아올땐 포용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다독이고 싶어도 다독여줄 수 없는 게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구나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주변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든 다 받아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여전히 좋은 친구이고 싶었던 내 욕심이 불러온 일들. 나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내 그릇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들켜버릴 때 오는 그들의 배신감과 허탈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너는 왜 내 기대에 부흥해주지 않느냐는 질타와 그때 넌 그랬지 하며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나를 미워했다던 말들. 모든게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그 폭력적인 상황들을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정말로 상대의 상처에 귀 기울일 수 없었다. 그게 내 그릇이었으니까. 이제야 이해한다. 나의 이런 빈틈마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남아있다는 것을. 그냥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알고 나에게 기대없이 사랑을 주는 이들. 그걸 느낄 때 나도 비로소 그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 내 주위엔 고마운 사람들과 좋은 음악이 있다. 인생 헛 산건 아니겠지. 나이 마흔에 되돌아 보는 아련했던 나의 그때 그 시절. 여유 없이, 허황된 목표를 세워가며 작업만이 전부인 줄 알고 열심히만 살아왔던 그 시절. 그때엔 그게 가장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니 그리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는.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렇게 열심히 안 살아도 된다. 그냥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 흐린 아침시간이지만 아주 예전에 들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니 다시 행복해진다. 그의 음악에는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한 온기가 있다. 피아노 선율과 합처져서 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아침. 우리 아기의 꺄르르한 눈망울을 보며 작디 작은 고사리손을 잡고 걸을 때,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런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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