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반의 무게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프롤로그
‘죽음’ 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문제의식을 주제화해 온 작가 서고운의 신작전이 열렸다. 이번 주제는 ‘태반의 무게’! 이번 전시는, 서고운이 출산의 경험 이후 갖게 된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인식’의 장이 펼쳐진다. 출산 직후, 미리 병원에 부탁했던 자기 태반을 받아와 살펴본 경험에 근거한 이번 전시는 태반이 지닌 따스한 온기와 미끈하고 물컹한 감촉 그리고 묵직한 무게로부터 추출되는 생명에 관한 작가의 사유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이전의 다루었던 죽음의 주제가 이번 전시에서 변모한 지점은 무엇이고 그 사유의 미학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II. 탄생 - 죽음을 여는 서막
어떤 생명에게나 탄생은 죽음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삶이란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것”이라는 서술은 인생에 관한 가장 간명한 정의가 될 것이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내 의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삶이 지닌 아이러니다. 죽음이라는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죽음은 인류에게 필연이지만, 어느 누구나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다. 즉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라는 주체가 늘 인식하는 간접 경험의 사건이다.
생계에 허덕이던 이웃 독거노인의 처연한 죽음, 오랜 병마와 싸워온 한 친족의 안락사, 젊디젊은 한 청년의 교통사,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전쟁 속에서 사라진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이의 죽음의 사건들은 늘 ‘살아있는 자’ 주변에서 벌어진다. ‘살아있는 자’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죽지 않고 남겨져 있는 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여전히 달려가고 있는 현 상황’을 공유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류에게 늘 화두였던 이러한 질문은 살아 있는 자를 늘 괴롭혀 온 주제이다. 생명을 잉태해서 세상에 내보낸 경험을 가진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사유의 전환점으로 맞닥뜨리게 한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는 나의 출생’과 대비되게 ‘나의 의도로 갖게 된 생명 잉태의 순간’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나로부터 기인한 다른 생명’에게 대하게 되는 일련의 책무와 같은 것이다.
작가 서고운은 이러한 지점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본다. 출산 이전과 이후의 인식 변화, 그것은 ‘나로부터 기인한 다른 생명’의 문제에서 ‘우리로부터 기인했던 무수한 생명’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다. 즉 서고운은 “내 아기를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아기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유괴 또는 아동학대로 버려진 죽은 아기, 전쟁의 포화가 야기한 아이들의 집단사와 같은 인간 죽음의 사건은 물론이고, 반려동물들의 처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이란 사건은 타자에게로 확장된다.
작품 〈그들은 단지 아이들이었다〉에서 서고운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잔혹한 참사들을 다루고 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무수한 희생자의 육신들, 그리고 그 뒤편에서 한 나신의 인간이 그 영령들을 기리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고 처연하다. 작품 〈애가를 읊조리며〉는 또한 어떠한가? 한 어머니가 아기를 포대기로 안고 있는 형상 주변으로 태반과 태아가 그리고 전체 이미지가 탯줄로 연결된 초현실주의적 풍경은 생명의 태동과 같은 감동 가득한 풍경으로 시작하면서도, 인간 욕망이 낳은 낙태, 사고가 낳은 사산(死産)과 같은 처참하고도 비극적인 결과를 한데 아우른다. 이처럼 생명이란 정녕 죽음의 무게 아래에서 납작 엎드려 숨을 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가?
또 다른 작품, 〈작은 천사〉 연작을 보자! 푸른 벨벳 천에 쌓인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육신 안에서 거주했던 세월을 마감하고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는 탄생의 순간을 거치며 비로소 세상과 마주한다.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존재로 모체에 있던 태아는 팔다리와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기관 있는 신체(corps avec organes)'로 인간 사회에 잠입한다.
그런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죽음을 향한 여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작품 속에서 벨벳 천에 쌓인 아기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죽음을 향한 출발점에 서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탄생과 죽음의 접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완결한 존재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작품명처럼 어쩌면 이 아기들은 잉태의 순간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랑스러운 천사일 수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생을 다해, 육신으로 살아가지 못하지만 천사의 존재로 어머니의 마음속에 남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지 속 갓난아기의 생사 여부는 여기선 주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서고운이 작품 속에 담은 갓난아기는 그 자체로 세상을 품은 존재인 까닭이다. 붉은빛, 보랏빛, 초록빛의 발광체처럼 표현된 아기들은 “대우주를 하나의 몸체에 담은 소우주로서의 인간”이라는 아포리즘(aphorism)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처럼 간주된다. 출생이라고 하는 ‘죽음을 여는 서막’이 이토록 숭고하단 말인가?
또 다른 작품에는 죽음의 극명한 이미지들이 있다. 〈마지막 숨〉 연작을 보자. 수술 장갑을 낀 두 손이 수술 도구 위에 사산한 태아를 들어 보이고 있는 장면이나 맨손으로 사산한 것으로 보이는 태아를 받치고 있는 장면은 처연하다. 원 모양의 변형 캔버스에 담은 이러한 이미지들은 죽음을 애도하는 짧은 장례의 순간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모든 탄생의 순간에는 극도의 긴장이 오간다. 이 사건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III. 생명 -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
삶과 죽음을 동시에 품은 탄생의 순간은 어머니 육신의 안과 밖에서 같은 듯 다르게 펼쳐진다. 어머니의 육신 안에서 태아를 키운 태반이 출생의 순간에 버려지듯이, 어머니의 육신 밖에서 ‘인간의 죽음을 향한 노정’ 중에 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또한 죽음의 순간에 버려지는 것들은 무엇일까?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는 죽음의 순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게 잉태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 삶의 과정과 죽음의 순간에 맞닥뜨리는 생명의 문제는 이제 물리적 육신이 품은 물질적 에너지의 유무에 관한 문제를 넘어선다. 사랑, 희생, 이타와 같은 추상의 담론이 우리에게 더 주요해지기 때문이다.
작품 〈Connected 1〉과 〈Connected 2〉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당면한 물질적, 물리적 상황은 논외의 대상이 된다. 성인의 손과 그것이 맞잡은 아기 손을 표현한 이 작품들은 세월의 무게가 다른 두 인격체가 만나는 순간을 담는다. 아기에게 그 만남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지속되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그것은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 속에서 전혀 뜻밖의 것들이 잉태한다. 사랑과 희생 그리고 책무와 같은 추상적 관념이 그것이다.
작품 〈트라우마 Trauma〉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 인간들은 인류의 존재적 상황을 표현한 아이콘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품명처럼 누군가로부터 태어난 나의 존재가 또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고 세상에 내보내는 가운데 어떤 트라우마처럼 인류가 지속된다는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즉 한 개체가 죽음을 향한 여정 속에서 맞닥뜨린 여러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 역시 지속된다는 이야기를 품어 안는 것이다. 세상에 나온 무수한 생명,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다른 인격체들의 만남, 그 사이에서 사랑과 희생 그리고 책임의 무게는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자와 나 사이에 벌이는 미움, 질시, 무관심, 방기, 폭력, 억압 같은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심지어 협박과 위해 그리고 살인에 이르는 사건들은 생명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생로병사와 같은 자연스러운 세월의 무게가 아닌 타자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세월의 무게는 생명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버겁게 만든다.
이전 개인전에서도 선보였던 작품 〈원귀도〉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재등장하는 만큼, 작가의 입장에서 출산 전과 후에 변화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재성찰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화면의 전면 중심에 펼쳐진 붉은 천위에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신과 같은 육질의 덩어리가 자리하는데, 그것은 기생충이 자양분을 삼아 스멀스멀 자라나는 죽음의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 뒤편에는 사지가 절단된 남자, 끈으로 포박당한 여자, 온몸에 상처로 가득한 핍진한 표정의 여인 등 고통에 절규하는 인간 군상과 해골만 남은 인간, 춤추는 마귀의 형상이 엇갈리는 지옥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풍경이자 죽음과 삶이 겹쳐 있는 현실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지옥도와 같은 풍경 위로 기어 다니는 어린 아기의 하얀 실루엣 이미지는 죽음의 그림자 위에 삶이 겹쳐져 있는 현실을 되뇌게 하기에 족하니까 말이다.
그렇다. 생명 가득한 현실의 삶에는 죽음이 함께 자리한다. 그런 면에서 현실 속 생명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匍越)하는 순간들이 여실히 지속되는 무엇이다. 포월이란 한자의 의미 풀이대로 ‘기어서 넘는’ 일련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현실 극복과 이탈을 주도하는 초월(超越)과 대립한다. 그것은 탈주의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초월과 달리 현실을 안고 엉금엉금 느리게 기어 넘는 지난한 넘어섬의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력과 같은 실천의 면모와 달리 필연적인 도래의 양상을 드리운다. 즉 포월은 현실을 사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노력보다 생명에 대한 필연적 양상에 대한 순응을 요청한다. 포월하기! 그것은 결코 나의 의지가 아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필연적 덕목인 셈이다.
IV. 에필로그 - 태반의 무게 혹은 사랑의 덕목
인간 현실 속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벌어지는 시기, 질투, 모함, 사랑, 보살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인간 욕망이 촉발하는 결과물처럼 보인다. 죽음 앞에서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욕망이지만, 인간은 죽음을 달려가는 생의 순간들마다 이러한 욕망을 탐한다. 그 욕망이 야기한 무수한 결과 중 선보다 악에 가까운 많은 것들이 우리의 현실을 어지럽힌다. 사랑과 희망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을 매번 맞이하면서 살고 있는 현실 속 인간에게 타자를 사랑하고 타자에 대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란 내가 실천하는 의지이기보다 마땅히 그래야 할 필연적인 인간의 덕목인 셈이다. 어찌 보면 사랑이란 진화론적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고 하는 공생하는 인간이 지닌 덕목처럼 보인다.
서고운이 출산 이후 펼치는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주제인 ‘태반의 무게’는 그러한 점에서 설명하기에 간단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그 메시지는 선명하다. 생명을 잉태한 인간 주체가 타자 앞에서 늘 생명 존중에 대한 책무를 다해만 한다는 작가의 결단과도 같은 이 주제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보편적인 인류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기하는 까닭이다.
어린 아기를 무릎을 꿇은 채 품어 안고 있는 작품 〈포옹〉이나 아기를 품어 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는 〈눈물로 품은 사랑〉 연작은 이러한 차원에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되묻는다. 어머니의 모습은 자신이 자의로 잉태한 생명에 대한 아픔, 상처, 죽음마저 보듬어 안아야 할 ‘사랑의 책무를 지닌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의 책무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으니〉나 〈절망을 마주하기〉가 선보이는 상징화된 이미지는 작품명에서처럼 절망의 어둠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는 어둠 속에서만 피어나지 않는다. 생명이라는 것이 죽음의 무게 아래 맞물려 있다고 보는 까닭일까? 서고운은 생명 탄생의 순간을 그린 작품 〈우리 모두, 우리 손으로 무너지기 전에!〉에서 생명 사랑과 그것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산고를 겪고 있는 어머니를 둘러싼 목각 인형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군상이 아기의 탄생 순간을 지키고 있는 장면을 선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장면 뒤로 거대한 손이 악귀를 퇴치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복잡다기한 화면을 통해 인간 생명의 지속성을 갈망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는다. 전시명 ‘태반의 무게’라는 것이 이러한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와 같은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탄생이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의 출발점’이다. 그런 면에서 탄생은 죽음을 여는 서막이기도 하다. 그러나 탄생으로 비롯된 생명은 죽음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생명은 죽음 이전까지의 지난한 과정이지만 죽음은 언제나 생명 주위에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가히 생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포월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의 문제의식을 조형적으로 성찰하는 서고운의 이번 개인전은 출산 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반의 무게를 화두로 삼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랑의 덕목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선보인다. 따라서 그녀가 제시하는 ‘태반의 무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죽음으로부터의 희망, 죽음으로부터의 생명을 견인하는 가장 큰 힘인 사랑을 통해서 측량될 무엇이라고 할 만하다. ●
감사합니다.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