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그림을 좋아한다. 익숙한 것 같은데 뭔가 익숙하지 않고, 자꾸 보다 보면 기이하고 불편한 지점에서 나름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그림 말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도 그런 작업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온전히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운 부분만을 표현하는 것만은 또 원치 않아서, 미와 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결국 매번 좌절하고 실패하면서 회화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 14년 전에 함께 작업실을 썼던 동료 작가가 얼마전 내게 말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가 함께 작업실을 썼을 때, 내가 알람을 맞추고 자다가 알람 소리에 깨서 수첩에다가 꿈에서 본 것들을 적던 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게 그림으로 그려졌다고. 그때를 생각하니 너무 좋다는 말도 함께였다. 나는 사실 지금도 꿈에서 본 것들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고 있다. 그런데 14년 전 내가 그렸다는 그 그림을 잊고 살다가 알게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의식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무의식은 전의식으로 넘어갔다가 어느 순간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그리려 했고, 그 이후에는 그 경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경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애도하다가 결국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죽음에 대한 전시를 보여드릴 수 있게 된 건 2017년 더 디바인 코미디 전시와 2018년 아웃랜더스 전시였다. 나의 작업적 계보는 이렇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리게 되었던 배경에는 감각의 무한한 겹들과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있었다.
# 나는 추상과 구상 작업을 구분하지 않고 좋아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 통해 무언가를 선동하려는 느낌의 그림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선동의 이미지, 교조적이고 계몽적인 이미지. 강해 보이려고 하는, 어쩌면 아주 강하게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의 작업들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담겨있지 않은 그림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결과물까지 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쏙 빠져있는 그런 그림들 말이다. 간혹 그런 그림들 중에서 명화들을 가져와 손쉽게 형상화하고 그럴싸하게 보이게 현란한 붓터치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데(그런 그림들이 잘 팔린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은 그런 작품을 하는 작가가 나에게 '너는 그러지 않겠지만'이라는 말을 계속 던지며 비꼬듯 이야기하고, 자신은 200호를 하루에 다 그릴 수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을 때 정말 진지하게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의 입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정봉이가 귀를 막고 아아아아아 안들려어어어어 하는 장면이 있는데, 가끔 나도 실제로 그러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작품이 그저 하나의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되는 그런 지점을 너무 서스름없이 드러내는 화가의 얕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 작가는, 이미지를 감각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느낌대로 충실히 하면 된다. 그냥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 그만이다. 어제는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작업실에 나와서 계속 삽질만 하다 갔다. 어깨가 축 쳐졌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삽질이 어떤 결과로 드러날지 나조차 가늠이 안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질은 계속 될 것이다. 그렇게 매번 실패하며 더욱 더 작업을 놓을 수 없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