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21. 3. 12. 13:07

"많은 사람들이 내 두 가지 주요 직업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볼지 모른다. 미국 중산층 지식인/아내/주부/세 아이의 엄마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을 말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게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해당하는 인생의 만년에 선 나는 그 두 가지가 어쩔 수 없이 부딪히긴 하지만 양립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이 포기하지도 않았고, 예술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거나 인생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생과 예술이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깊이 떠받쳐주었던 탓에, 돌아보면 다 하나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삶과 사랑과 작업 이 모든게 돌아보면 다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것이 곤욕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 큰 행복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각자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상대적인 육아에 대한 말들은 너무도 많다. 누군가는 육아에 대해, 왜! 좋은 얘기들만 있고, 힘든 얘기들은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느냐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왜! 육아에 대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얘기들만 너무 많이 하고, 행복한 이야기들은 감추느냐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적인 것들을 다 떠나서 가장 중요하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생명을 낳아 키운다는 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새로움을 선사하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그래서 무엇을 꼭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깊이 떠받쳐주었다는 말에 아주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일에 대한 신념이나 열정이 소진되고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나를 버텨내게 해주는 것이 가족이고, 가족의 분열로 힘들 때 일로서 나를 지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를 버리고 꼭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밸런스를 맞춰가며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그렇게 삶과 사랑과 일이 나를 지탱해줄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아기가 없던 우리의 삶에서도 밸런스는 너무나 중요했다. 그 밸런스를 위해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각자 자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아기가 들어왔을 때, 그 밸런스에 더 많은 의미를 두게 됐다. 의견을 조율하고, 투닥투닥 싸우고, 화해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그 과정은 너무 중요했고, 필요했다. 모든 게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되듯이, 그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작은 행복의 씨앗이 되었다. 나는 이제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어른이 된 것만 같다. 아기로 인해 내 삶이 너무 풍요로워 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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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21. 1. 16. 15:09

...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친구와 함께 언 강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사별이 몇 차례 그녀를 관통했다. 그러고도 다시 웃으며 지내는 듯 보였지만, 웃음과 웃음 사이에 캄캄한 허방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위로의 불가능을 절감할 뿐이었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겨울에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오래 추워봐야 한다'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기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바뀌는 모자를 알아채주는 정도의 일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쓴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모자를 쓰든 그녀의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르든 "이제 모자를 좀 벗는 게 어때?"라고 말하지 않기. 그 응시와 침묵이 내 편에서의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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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19. 8. 19. 14:44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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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19. 5. 1. 14:31

그때 나는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고 싶다 생각하며 죽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한편에서는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방식으로 삶을 끝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계속해서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사이 나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노인이 되었지요 나도 한때는 살갗에 이렇게 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불행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엄중히 처벌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같은 것 말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런 말을 공연히 내뱉은 겁니다 사회가 개인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수많은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다니카와 슌타로를 즐겨 읽었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그는 노인들은 이제 인생을 묻지 않는다고 했어요 다만 거기 있는 것으로 인생에 답하고 있다고요 노인의 입장에서 나는 그런 태도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다만 내가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가끔씩 그의 말을 빌려 되묻곤 합니다 여기에 조금 더 머물러 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일생을 다해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무엇이 나를 중요하게 여긴단 말입니까 언제든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은 편안합니다 행복한 순간이 오면 죽고 싶습니다 그럭저럭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도 보면 우유부단해서일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입니다

Posted by goun
books2019. 4. 18. 18:41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수전손택, 보르헤스, 한나아렌트 다음으로 네번째 말 시리즈를 샀다. 프리모레비의 말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모은 책이라고 해서 정말 꼭 갖고싶었고, 리커버 한정판 주기율표는 예전 책이 너무 안예뻐서 안사고 있었기때문에 (ㅋㅋㅋㅋㅋ) 이번이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실물로 보니 더 예쁘네. 책 살때 기분이 젤 좋다.^^

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