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22. 5. 19. 11:47

아득한 봄날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닺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둥그런 거미줄

둥그런 거미줄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하얀 씨줄과 날줄의 교차,
고통은 망상 조직이다.
그 망상의 중심 하나, 맹목점,
보편의, 눈먼 장미 한 점.

온통 뼈뿐인 우주 하나,
흔들리다 곰삭아
우수수 무너져내린다.
흰 뼛가루가 백지 속을
가득 덮는다.

한 여자가 제 삶의
가로수길을 다 걸어가
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소실점이 지워진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20년 전쯤 처음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홀짝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대책 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쇼트 스토리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저 창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의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제주기

한때 불이었고
폭풍이었던 모든 것이
물로 돌아가는 시간,
내 시야의 전 우주에
찰랑찰랑 물이 넘치고,
그 위로 빛무리 넘실대고

그 위로, 아, 바람의 계단들,
그 맨 꼭대기 허공, 바람의 절벽,
거기에 내가 알았던 모든 얼굴들
잔잔한 풀꽃들오 피어 흔들리고,
바람이 허공의 피아노 건반을
재빨리 한 번 훑을 때마다
무수한 음께들로, 까르르 까르르르,
시야 가득 번져가는 웃음소리들.

(모든 길들은 돌아가는 길들이고,
모든 여행은 돌아가는 여행이다.)



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