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24. 11. 8. 10:31

그 순간 내 삶은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삶과 죽음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큰 바다를 향해 작은 강물들이 모이는 듯 해. 그리고 나는 망망대해에 돛단배 하나 타고 하릴없이 흐느적거리는 존재처럼 느껴져. 살아간다는 건, 죽는다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삶과 죽음이 한 단어로 불리는 것을 들으며, 이제 막 백일을 넘긴 내 조카를 보며, 오늘도 생의 의미를 반추하며 길을 나서. 엄마 손을 잡고 소아과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유아를 보고, 반세기 전에는 엄마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바싹 마른 나무처럼 늙어버린 손으로 폐지를 줍고 있는 노인을 봐.

결국 인생이란 것도 그런게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 그게 돈이든 나의 인연이든, 심지어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기억이든. 세월이 흐르면서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듯 서서히 하나 둘씩 바람을 타고 사라져가고 나중에 홀로 남은 나 자신만이 눈을 감게 되는 것.
적지 못한 감정, 담지 못한 마음, 쓰지 못한 기억, 하지 못한 노래. 그리고 잊지 못한 사람에 관한 모든 기억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건 어떤 비극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 부질없이 느껴지는데, 나는 뭐가 아쉬워서 모든 것을 꽉 붙잡기 위해 아등바등 현재을 보내는 걸까.

Posted by goun
books2024. 11. 6. 11:20

"우리는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낳아진 존재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감사할 일이다. 만약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더 나쁜 상황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할일이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 바다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이 바다의 광활함과 깊음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죽은 자들로부터 배워 지금 우리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들로부터 무언의 말을 들어야하고 그들에게서 배워야한다."

나주영 법의학자님의 책은 그 전에도 읽었어서 쉽게 쉽게 쓰신다는 거 알고 가볍게 골랐다. 그런데 이번에도 꼭 필요했던 이야기들, 콕콕 찝어서 이야기해주셔서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책읽기를 끝냈다.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도 매번 써야지 써야지 하고는 잊어버리고...이번에 이 책 읽고 빨리 써놔야겠다고 다짐.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은 아니니 현실에 충실하고 죽음을 기억하며 잘 살자는 큰 이야기들인데 죽음과 관련된 책과 그림 영화들을 추천해주셔서 좋았다. <제 7일>, <죽음의 에티켓>,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곧 읽어볼 예정이다.

Posted by goun
books2024. 9. 11. 11:08

#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다 읽었다. 빈 공간이 많이 느껴지는 그런 소설이었는데, 그 ‘빔’이라는 것이 부족하고 어설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작가가 그렇게 둔것 같은 느낌이었다. 덤덤하게 쓰지만 뭔가 애정이 가득하고, 여러 상황들을 고정시키는게 아니라 유추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왜 울컥했지. 정말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는 그런 느낌의 페이지였는데… 그 소녀에게 감정이 이입되었던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아빠’라고 부르는 그 장면에서 더욱.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서 말을 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아닐까. 따스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그런 소설이었다.

#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말을 하기 전의 침묵과 말을 한 후의 침묵은 같으면서도 다른 침묵이니까, 나는 계속 무언가를 쓰고 다시 지우고 쓴다.

Posted by goun
books2024. 6. 19. 15:08

나는 정보라 작가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삶을 살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취미가 데모이고 부조리한 상황들에 다한 항의를 담고 싶으셨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SF작가라고 말하신 적도 없으니 그런 쪽으로는 기대를 하지않는것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쨋거나 부커상 후보에도 오르셨고, 책도 자주 내시니까 열심히 전업작가 생활을 하시는구나 했는데, 전업이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걸 이번 책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읽은 글로써만 이분의 작품들을 이해하고 쓰는 감상평이라 하겠다.
처음 몇몇의 단편을 읽고서 엄청 실망스러웠다. [여자들의 왕] 그 때의 실망감과 비슷했다. 이유는, 이런 중대하고 가볍지 않은 소재들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나?였다. 소재를 그저 툭 던져놓고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문장 자체를 엄청 고민하고 퇴고하며 쓰는 게 아니라 투쟁과 운동에 몰입된 자신과 동물권 관련된 이야기를 그저 툭 던져놓는 느낌.(던져놓는게 뭐 어때?라고 말 한다면 할말 없지만 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글빨이었다.) 소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 탄탄한 구조가 돋보이는 것도 아니고, 문장들도 성의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나열되어 있다. 뭔가에 꽃히면 바로 그냥 파바박 하고 빠르게 써 내려가고 뒤 안돌아보는 느낌이다. 문장은 정제되어 있지 않고, 어떤면에서는 거칠고 단순하다. 경북지역의 외국 투자자 공장 부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몇문장으로 그냥 끝내버리는 패기. 답답하게 계속 검은 덩어리 얘기만 주구장창 나오다가 결국 그게 고래가 되어 자신들의 외계 바다로 들어갔다는 결말. 해파리는 또 어떻구? 해파리에서는 분명 죽음과 삶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그래서 이건 좀 읽어볼만 한가 싶다가... 일기처럼 쓰여진 작가의 말을 읽고 또 한번 실망. 해파리라는 소설에서 어디에 '정신 감응'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죠? '정신 감응'이라는게 조금이라도 설명이 되었다면 이해를 할텐데, 그렇게 단어 혹은 글로 대충 툭 써놓으면 끝나는 그런 둔감함이 나는 너무 불편한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다룰수는 없는건가? 더 예민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건가? 왜 선과 악은 그렇게 단순하게 그려지고 이런 어두운 소재들을 가볍게 다루어야 하지? 내가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서 더 예민하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작가님이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니면 저주토끼 번역가님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거나…)
그런데 사실 이런건 다 개인의 취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분은 정보라 작가님의 글이 재미있기 때문에 좋다고 하고, 어떤 분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에서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고도 하는데, 내 기준에서는 신선한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산만하고 가볍다고 느낀다. 이건 아주 주관적인 감상이다. 아주 솔직하게는… 정말 좋은 작가들이 많은데 그런 작가들은 과소평가 되고, 누군가는 전업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서도 과대평가 되는 현실이 싫은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내 시간을 들여 감상평을 남기고 있네. 이것 또한 작가님에 대한 애정일까… 강의하고 데모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남기고자 하는 그 열정을 내가 잘 몰랐을지도. 아무튼 나는 또 다음 책이 나오면 읽어볼 것 같다.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의학자의 서재 _나주영  (1) 2024.11.06
맡겨진 소녀 _클레어 키건  (0) 2024.09.11
방 안의 호랑이_박문영 (추가 예정)  (1) 2024.06.19
비키 바움 <크리스마스 잉어>  (0) 2024.05.29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1) 2024.02.01
Posted by goun
books2024. 6. 19. 15:07

박문영 작가님의 이전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가 보였다면, 요즘은 인간의 탄생과 그로인한 육아의 노동을 넘어 선 사랑과 이해(애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관념들은 싹 다 버리고, 전복하고, 비틀면서 다채로운 구조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문장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퇴고 끝에 완성을 했을까…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셨을까 그런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주인공들 뿐만아니라 그 주변 것들에까지 다양한 연구와 노력의 흔적들이 느껴지니 말이다. 하나라도 가벼이 넘기지 않고 어떻게하면 나의 상상을 현실처럼 그려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 의지! 그리고 매번 결론은 상상 그 이상이다.

“연음은 땅에 누워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는 무주지 사람들이 처음에 품은 질문을 사랑했다. 열린 강령, 양육 수칙보다 더 자주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을 꿈꾸지 못하는 인간이 인간일까. 자신과 이미 닮은 것만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름다울까. 연음은 그런 물음을 조용히 곱씹어보던 시간이 좋았다.” -p.40

“지구가 열악한 행성이 된 이유를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누군가 죽은 이유를 심정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했다. 지구가 열악한 행성이 될 때까지 누가, 어떻게 살았나. 왜 그렇게 지냈나.”
-p.41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나는 박문영 작가님의 책들이 너무 좋다. 그래서 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뭐라도 남겨놓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 SF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추천했고 바로 다담주에 읽고나서 토론하기로 했다.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기대된다. 

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