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22. 6. 16. 13:57

그림에 관한 꿈을 자주 꿨다.
전시가 다가오면 꿈꾸는 횟수와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매일 꿀때도 있었고, 하루에 여러개의 꿈을 꿀때도 많아서 눈 뜨자마자 메모장에 적어둔 꿈 일기들이 수두룩빽빽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주인공처럼 꿈속에서 나왔던 그림을 현실에서 애써 기억해내려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왜 항상 꿈속에서 본 그림들은 현실에서 재현이 안될까? 그 컬러와 구상들을 잊지 않으려고 아무리 기록을 해놓고 떠올려보려해도 그 감각들은 완전히 휘발되어버리고 남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는 엄마가 식칼로 남편의 목을 따고 뒤이어 딸도 죽이려하다가 미수에 그치고마는 장면이 묘사된다. 첫 페이지서부터 아주 눈을 떼지 못하겠더니 중간 이후까지도 뭔가 현실이고 꿈인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수가 없어서 막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헉 이게 그거야? 엇 이것도 아니야? 그럼 뭐지? 아 이건가? 아니네? 완전 다 꿈인거 아니야? 그것만 환각이었나? 다 없던일인가?... 계속 머리위에 퀘스천마크가 또잉 또잉 솟아나고, 결국 마지막 50페이지 정도에서 진실을 알게되면 무척이나 소름돋는 반전의 반전이 나온다. 이 작가는 소설을 완성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절대 쉽게 쓸수 없는 글이었고, 이런 작가가 한국에 있다니 하며 감탄하고 응원하며 읽었다.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앞으로 가서 80페이지 정도까지 다시 읽었는데 좀 소름이었다...강추하는 소설!

Posted by goun
books2022. 5. 19. 11:47

아득한 봄날

통과해야만 할 아득한 봄날의 시간이
저 밖에서 선혈처럼 낭자하다.
베란다 앞 낮은 산을 뒤덮으며
패혈증처럼 숨가쁘게,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진달래.
눈물이 나 더는 못보고
쪽문을 소리내어 쾅 닫는다.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내 앞에 펼쳐질
봄 꽃, 여름 잎
가을 단풍, 겨울 눈꽃.

닺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인조 장미 몇 송이가
무게도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둥그런 거미줄

둥그런 거미줄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하얀 씨줄과 날줄의 교차,
고통은 망상 조직이다.
그 망상의 중심 하나, 맹목점,
보편의, 눈먼 장미 한 점.

온통 뼈뿐인 우주 하나,
흔들리다 곰삭아
우수수 무너져내린다.
흰 뼛가루가 백지 속을
가득 덮는다.

한 여자가 제 삶의
가로수길을 다 걸어가
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소실점이 지워진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
내세의 모래 언덕들,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

창가에서 20년 전쯤 처음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
찻잔을 홀짝이다가, 나는 결정한다.
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
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
한때는 그것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
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
그러나 대책 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쇼트 스토리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저 창밖 풍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
눈먼 하늘의 흰자위,
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
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제주기

한때 불이었고
폭풍이었던 모든 것이
물로 돌아가는 시간,
내 시야의 전 우주에
찰랑찰랑 물이 넘치고,
그 위로 빛무리 넘실대고

그 위로, 아, 바람의 계단들,
그 맨 꼭대기 허공, 바람의 절벽,
거기에 내가 알았던 모든 얼굴들
잔잔한 풀꽃들오 피어 흔들리고,
바람이 허공의 피아노 건반을
재빨리 한 번 훑을 때마다
무수한 음께들로, 까르르 까르르르,
시야 가득 번져가는 웃음소리들.

(모든 길들은 돌아가는 길들이고,
모든 여행은 돌아가는 여행이다.)



Posted by goun
books2021. 8. 20. 10:20

이 책을 중간정도까지 읽었을 때, 내 마음속에서 뭔가 강한 열정같은게 불지펴지면서 장의사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장의사가 되는 법을 검색하고, 장례학과가 어느 학교에 있는지, 대학원은 있는지 다 찾아봤다... 이 책을 너무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를 좀 바꿔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왠지 내가 장의사가 되면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내가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을 한건지 주변에서 무슨 장의사냐며 반대를...ㅋㅋㅋㅋㅋ 뭐 내가 당장 한댔나? 그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찾아봤을 뿐인데.ㅋㅋㅋㅋㅋ

난 이 책에서 자연장에 대한 챕터가 가장 흥미로웠다. 죽은 사람을 그냥 흙안에 넣어서 분해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과정 ㅡ질소 농도가 높은 것들(음쓰나 풀 쪼가리 같은것)을 탄소 함량이 높은 물질들(나뭇조각이나 톱밥)과 섞은 뒤에 습기와 산소를 더해서 미생물 박테리아가 조직을 분해하게하는ㅡ이 굉장히 좋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장례 형태였다. 그냥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런데 이것을 연구하는 박사도 아직은 완벽히 실험이 끝난게 아니고 아직 연구중에 있어서 시신을 기증받거나 죽은 곰 같은 동물들의 시체로 연구를 더 하고 있다고 한다. 뼈까지 흙으로 만들어 퇴비가 되는 과정을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이뤄질수 있도록 하는게 기술인 것 같다. 뭐 오랜시간 묻어두면 언젠가는 흙이 되겠지만... 많은 분들의 시신이 이곳(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컬로위)으로 가서 시체가 퇴비가 되는 장례를 치르고 조금이나마 자연 환경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인도네시아 토라자에서의 장례 문화(마네네 의식)는 좀 섬뜩했는데, 죽은 시체와 몇년씩 같이 살거나 묻어둔 시체를 3년에 한번씩이었나? 꺼내서 같이 사진도 찍고 기념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것, 경계가 없다는 건 정말 이곳을 이야기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사랑하던 사람의 시체라면 전혀 무서울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체를 꺼내어 닦아주는 일도 가능하겠지.

나는 쓸데없이 생명을 연장시키면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냥 죽을때가 되면 조용히 내 한몸 뉘울 곳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 흙과 하나되어 여생을 끝내고 싶다. 우리 부부는 생을 마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걷고난 뒤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종종 말해왔는데, 아기가 태어났으니 그마저도 쉽지는 않고. 그냥 산티아고 길에 뼛가루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길 순 있을 것 같다.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라스텔이라는 라스트와 호텔의 합성어인 장소가 있다고 한다. 시신 호텔?! 들것과 일꾼이 타는 엘레베이터가 따로 있고, 냉장 저장실에는 시체를 스무구까지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오호~ 가족실도 따로 있고, 고인의 시체는 나흘 정도 안치될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시체를 씻길 수 있는 욕실도 있는데 시체를 씻기고 시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슬픔을 달래는데에 강력한 역할을 한다고 하니, 참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물건과 이별을 할 때에도 고민을 하면서 며칠 더 가지고 있아볼까 하다가 마음의 정리가 되면 버리는데... 사람은 더 더 그렇겠지. 젊은 여자 장례지도사인 케이틀린 도티는 세계 여러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례 문화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다양한 문화들을 통해서 조금 더 나은 장례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의 행보가 너무 기대되고 박수치고 싶은 마음이다. 한 인간의 ‘삶의 마지막 길’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멋진일이야~ 그녀의 신간 <고양이로부터 내 시체를 지키는 방법>도 너무 재밌게 읽었다!



강추 강추! (옆에 나의 비거니즘 만화도 완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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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21. 7. 19. 01:08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써보려고 몇번을 시도했으나 나는 이 책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냥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그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싶다. 이 책을 쓰고자했을 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나는 그의 삶을 아주 조금 들여다봤을 뿐이다. 이정식 작가의 글이 너무 좋았다. 오래 오래 예술가로 남아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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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21. 3. 20. 00:34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었던 것 같다.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그것들을 깊숙하게 파고들어 스스럼없이 차분하게 풀어놓았다. 읽고 있는데 속이 엄청 후련해지고 긁고 싶었던 부분을 싹싹 긁어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들을 기록함으로써 회화에 대해 더 많은 담론들이 생겨나고, 다양한 비평의 지점들이 발화하기를 바란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좋은 책이다. 속이 답답해질 때 언제든 다시 꺼내어 읽고 싶은 책. 나는 이재헌 작가님께서 삶을 의지의 문제로 간주했던 자신의 태도가 어느 순간 주어진 삶에 충실해지는 것으로 바뀌었던 때를 이야기한 것이 너무 와 닿았다. 물음들이 더해지며 그 대답할 수 없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의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그리고 삶 속에서의 자신의 나이 듦에 대하여. 동굴의 방향보다 깊이와 넓이가 중요하다는 말에는 깊이 공감하였다. 또다시 '나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책이었다. 

* 이재헌 작가의 일상을 그린 다큐 영화인 원태웅 감독의 <나의 정원> 보고싶은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볼 수 있는 방법 아시는 분 댓글로 남겨주세요.

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