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인 <더 룸 넥스트 도어>를 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영화를 내 최애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죽음에 대한 명상을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을, 아니면 가까운 타인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그리고 관계들, 시간들 사이의 여러가지 감정들... 죽음에 대한 세심한 대화들과 위로와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너무 따뜻하면서도 비극적인 감정이 계속 교차되었는데, 그건 이 둘의 연기가 너무 훌륭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속 아름다운 컬러들에 매료된 상태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준 영화.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정말 보고싶었던 영화 <공작새>를 드디어 보았다. 보고 나왔는데 계속 여운이 남아 가던 길을 멈추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영화는 올해 나의 최고의 영화다... 나는 퀴어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고, 가끔은 퀴어 영화에 반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게 왜 반감이 드는지 묻고 싶은 심정일때가 많다. 그리고 그냥 그들의 삶을, 내가 잘 모르는 삶을 바라보고, 쉽게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가끔 퀴어 영화들을 보면 저예산 독립 영화일 경우가 많아 퀄리티가 떨어지거나 연기가 매우 어색한 경우나 연출에 있어 아쉬움이 클때가 많았다.
그래서 였을까? 공작새는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퀴어 영화보다도, 아니, 그냥 퀴어라는 단어를 빼고도 참 좋은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가끔 유투브로 왁킹 댄서들 배틀 영상을 볼 때마다 감탄을 하고 침을 흘리며 보곤 했는데, 이 영화에는 실제로 왁킹댄서로 활동하고 계시는 해준님이 배우로 나온다. 얼굴, 표정, 연기… 다 빠지는거 없이 멋졌고, 특히 춤 추실때… 피지컬 장난아닌데 그 긴 팔과 다리로 진심을 다해 추는 모습에 정말 전율이 일었다. 내가 뽑은 최고의 씬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조깅을 하다가 추는 즉흥 춤 장면 아닐까. 그 춤 장면이 두번 나왔는데 둘 다 너무 아름다웠다. 카메라 무빙과 연출의 힘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영화 보면서 잘 우는 타입 아닌데 이 영화 보고 3번이나 눈물이...ㅠㅠ 아. 아름다운 미장센에 빠져들다가, 배우들의 연기에 또 빠지고, 해준님의 춤에 빠지고, 마지막 용서와 화해를 통해 연대하는 장면에서 빠지고… 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뻔하지 않게, 진심으로 다가온 그런 영화였다고 고백해본다. 결국은 사랑이고 연대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 영화를 다들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12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을 보게 됐다. 12분이 무슨 5분처럼 지나간 듯 했다. 엄청 간결하지만 가슴이 훅 들어온 슬픔이 오래도록 잦아들지를 않았고, 울음을 참으려고 해니 코끝이 찡해지면서 목구멍이 매워졌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아기에게로 초점이 맞춰졌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건 꽤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자식을 잃는다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인데, 이 애니메이션은 부모의 심정이 너무 잘 표현되어 있어 대사가 없는데도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슬픔. 이런 종류의 슬픔은 부모가 되고 나서야 그 깊이를 알 수 있구나. 사실 예전에는 머리로만 알고 상상만으로 그 슬픔을 가늠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들 부모가 되어 봐야 안다고 말하는 것이구나. 보는 내내 너무 슬프고 힘들었지만, 추천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 건강하고 헛되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그냥 열심히만 사는 것 말고, 주변에 사랑하는 것들을 잘 챙기면서요.
요즘 인도영화 보면서 리뷰를 해야겠다 생각이 든 영화는 몇 편 없었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두 편이 너무 좋아서 남겨본다.
1. 연인 사랑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의 딸과 결혼한 주인공. 이 영화는 마지막 반전 아니었으면 그저 그랬을 것 같은데, 주인공 남자의 고백으로 인해 상황이 반전된다. 근데 캐릭터 몰입도는 좀 낮은 편. 갑자기 바뀌니까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꾸준히 사랑만을 갈구하는 부인의 캐릭터도 클리셰하고 그런 부인에게 총을 계속 들이대는 주인공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근데 짧은 단편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조금은 뻔한 복수 사기극.
2. 장난감 남의 집에서 파출부 일을 하며 전기가 끊어진 집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밑바닥 인생 자매. 언니는 돈을 벌어 동생의 학비를 대지만, 불법으로 전기를 훔쳐쓰고 있다가 동네 주민이 전기를 끊은 탓에 어떻게든 전기를 사용하려 별별 방법을 쓴다. 언니는 그런 상황 속에서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사는 '요령'만 터득했고, 어린 동생은 그런 언니의 말을 철석같이 따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엄마와 딸 같기도 한 이 관계는 매우 끈끈하지만 이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서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 불안해하며 봤다. 결국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건 한낱 장난거리에 불과하다. 마치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3. 쪽쪽 입맞춤 이 단편이 가장 좋았다. 특히 주인공 여자 배우인 콘코나의 연기는 너무너무 최고였다. 이 배우의 작품들을 꽤 봐왔는데 그때마다 연기파 배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었다. 콘코나가 연기한 낮은 카스트인 달리트 출신 바르티 만달은 석사 학위가 있어도 절대로 윗자리를 넘볼 수 없다. 바르티와 함께 일하는 동료 할아버지는 ‘윗놈들은 우리에게 식사할 책상은 주지만 일할 책상은 안 줘. 제 몫이 아닌 걸 탐냈다가는 놈들이 널 짓밟을 거야.’라는 말을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기계만 만지며 평생 살아야 하는 삶. 공장 안에서 단 한 명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자화장실도 없는 그곳에서 여성으로서의 존중따윈 없고, 남자 같은 그녀에게 조롱과 폭력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젊고 예쁜, 높은 카스트의 사랑스러운 프리타라는 여자가 등장해 바르티가 꿈꿨던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바르티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이 과정을 두 배우가 어찌나 잘 연기하는지! 소수자인 바르티와 순진하고 솔직한 프리타의 내면 감정 변화가 엄청나다. 장편이었으면 훨씬 더 잘 표현되었겠지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흡입력 있게 작품을 끌고 간다. 자신과 다른 카스트인걸 나중에 알게 된 프리타의 연기 또한 최고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말했지만... 난 바르티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높은 카스트인 사람들이 바르티에게 쓰레기를 담은 그릇을 주고, 다른 컵을 내어 주는 행위들... 선의처럼 포장해 말하지만 차별과 멸시가 바탕이 되어 있는 일들 사이에서 그녀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잘 만든 단편을 봐서 너무 좋았다. 나의 인도배우 친구 탄메이가 콘코나와 찍은 사진을 얼마 전 인스타에 올려서 봤는데 너무 반갑고 부러웠다. 인도에서도 콘코나의 인기가 꽤 높은 것 같다. 팔로워 수 대박.ㅋㅋㅋㅋㅋ
4. 하지 못한 말 첫 장면부터 달달한데 둘 사이가 어쩐지 너무 조심스럽다.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의 관계는 진실하지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그래서 너무 슬프다. 많은 말들을 하지만 소통이 안되는 남편과 말을 하지 않음에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 자신과 그의 사이에 가로막힌 문 뒤에서 흐느끼는 연기가 너무 일품이었다. 몇 번 돌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