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2024. 2. 15. 12:52

# 새해가 밝았지만 게으름에 늘어져 하루하루 시간을 축내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 겨울은 정말 내게 힘든 계절이지만 그래도 전시 미팅도 하고, 책도 읽고, 나름 미래 계획도 세우긴 했지. 그런데도 붓을 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붓을 든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나에게 이런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잡생각만 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간 못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고 안부도 묻고 그렇게 주변을 돌보며 지냈다. 그러나 머릿속은 엄청 복잡했다. 작년에 겨우 낸 두개의 공모는 다 떨어져버렸고, 언제까지 공모를 내고 앉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그리고 다른이들이 버는 한달 수입 정도도 못미치는 벌이가 나의 연봉이라는 것과 한달 벌이 조차 못벌때도 많다는 사실에 대해. 예전같으면 끔찍이도 덜덜거렸을 내가, 아이를 돌보며 무엇에 홀린듯이 -그 무엇이 행복이라 말해도될런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 형부가 세상을 떠난 후, 언니는 매일 매일 형부 생각이 난다고 했다. 요즘 보는 드라마 내남결에 남주가 너무 멋져서 수다를 떨다가도 언니는 '어깨' 이야기가 나오자 형부 얘기를 하며 웃는다. 형부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 평범하고 평범한 이 도시의 삶은 그저 흘러가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겪어도 그저 세상은 멈추는 일 없이 굴러간다. 고통의 얼굴을 한 언니를 보면서도 우리 가족은 이기적이게도 최대한 빨리 언니가 현실로 돌아오길 바랐는데, 그 바람을 언니도 알았는지 정신없이 현실을 살아냈고, 그 와중에 깊었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의 상처를 직면했다. 그래도 언니에게는 언니만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고, 가끔 언니를 걱정하며 와주는 친구들이 있고, 현실을 살아낼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내가 있었나? 내가 무슨 도움이 되었을까? 가끔은 나만 생각하며 사는 내가 진절머리날때가 있다. 각자도생이 익숙한 우리 가족은 그저 각자 자기만의 슬픔을 안고 나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건 아닐까? 그렇게 힘들고 아픈 와중에 한부모 청약을 내고,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는 나의 언니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면을 단단하게 하며 자신의 마음을 잘 가꾸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이들며 새삼 느낀다. 무탈하게 늙어가는 것, 그리고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잘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겠지?

# 나의 아버지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은 고행으로 시작해 고행에서 끝난다. 시골에서 그 수만점의 돌들을 끌어안고서, 물질을 경계하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무엇을 위해 그러시냐 묻는다면 그게 그냥 나의 아버지인 것이다. 스님이나 순례자같은 삶을 지향하시는걸까, 나의 아버지는 왜 그런 삶을 선택하셨을까?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아버지의 딸인 것이다. 콩콩 팥팥.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은 달라져야 겠다고 생각한다. 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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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24. 2. 1. 11:25

우연히 신간도서 라인에서 발견한 책인데, 빌려놓고도 앞에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서워 며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손을 댔다. 손을 대자마자 나는 김초롱씨의 트라우마들과 고통의 민낯에 완전히 침몰할 지경이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가도 대견하고, 함께 울고 싶다가도 다시 일어나라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곱씹으며 읽었다. 결코 그런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의 무지함에 너무 창피함을 느끼기도 했고, 과거에 되도 않는 위로를 한답시고 쉽게 내뱉었던 말들(특히 나의 가족에게)이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꽃혀서 너무 미안했다. '특히 우리 언니한테...제일. 난 정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도 나를 사랑해주어서 고맙다.'

끊임없이 슬프다가 마지막 즈음에 초롱씨가 그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내면서 했던 일들 중에서 다리미질과 게스트하우스 청소를 선택한 것에 정말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 초롱씨와 초롱씨의 주변 인들의 노력에 정말 감동했다. 그녀가 수천번 마음속으로 되내어야만 했던 것들을 함께 호흡하며 읽어내려갔고, 이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했다. 꼭 읽어봐야만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잘 모를거라고. 우리는 알아야된다고. 정말 좋은 책을 새해에 읽게 되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초롱씨에게 너무 고마웠다. 앞으로의 그녀의 삶을 정말 많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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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Diary2024. 1. 4. 13:45

2024년을 새로운 이슈로 시작하나 싶었지만 결국 새로운 이슈는 없었다. 12월 말, 나는 이른 새벽 출발해 익숙한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역을 나오자마자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여느때와 비슷하게 대기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날은 내가 가지고 있던 냉동 배아의 마지막 이식날이었다. 이번 배아는 눈사람처럼 생겼다.(괜히 귀여웠다.) 이식은 금방 끝났고 잠깐 누워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음. 왜 눈물이 나지? 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매번 동생 이야기를 하며 울던 아기의 얼굴. 밤마다 나에게 외치며 울었던 말…"나만 동생 없어!" 그리고 어젯밤에는 "두근두근 설렌다." 는 그런 말까지 했던 터 였다. 아기는 나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간절하게 염원 하고 있었다. 2년 내내 내 배안에 왜 아기가 없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온 아이였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아기를 낳고 육아를 하며 작업을 해온 그 시간들이 갑자기 폭풍처럼 몰려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많은 눈물이 눈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힘든 시기를 다시 겪게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이렇게 아기가 슬퍼하는데 왜 계속 이 몸뚱이는 실패만 하는지에 대한 마음도 있었다.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출산의 과정이 나에게 너무 지옥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출산할때의 그 트라우마가 나에게 제발 다시는 겪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여기에 누워있다니.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그렇게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는데도 목구멍에서부터 울컥거려 자꾸만 뿜어져 나왔다.

한편으론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나의 아기에게 고맙고, 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이번 이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떨리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많은 복잡한 감정속에 10분간 마음속 폭풍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나 새해가 되면서 테스트기에 손을 댔는데 결과는 뭐 뻔하게도 실패였다. 아침에 '엄마 뱃속에는 아기가 없다.'고 말하자마자 아기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가 밉고, 싫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야.'라는 막말까지 했다. 그리고는 또 화가난다며 엄마를 꼬집었다. 그러더니 엉엉 울면서 미안하단다. 엄마를 사랑한단다. 아기의 폭풍같은 감정 변화에 나도 쉽지 않은 아침을 맞았다. 속상해서 엉엉 우는 아기에게 '이건 엄마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든 쉽지 않은 삶이다. 오늘은 더 더욱 쉽지 않은 아침이었고. 엄마에게 아기는 너 하나면 된다는 걸 잘 이야기했는데도 자기는 동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너의 엄마고, 너 또한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기야.'라고 이야기했더니 엉엉 울며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아기의 마음을 달래주고 작업실로 돌아와 수업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올해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겠구나, 보류해두었던 많은 일들을 시작해도 되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늘이 나에게 더 이상 아기를 주지 않는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이 후련했다.

난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나보다도 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 한 해였다. 그리고 이제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아기의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세상에는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없으니 말이다. 이제 24년 앞으로가 기대된다. 또 어떤 작업을 할까 내심 설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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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
books2024. 1. 3. 16:04


-등 뒤로는 오래전 시간들이 사라져가고 발밑으로는 짧은 과거들이 사라져가면서 그래도 매일 한 발은 현재, 다른 한 발은 미래라는 불완전한 땅을 밟으며 나아가고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몫을 감당하고 있으며, 걸어온 시간에 비해 앞으로 걸어갈 시간에 대해 무지한 건 나이에 상관없이 마찬가지니, 서로의 무지를 따뜻하게 바라봐줄 수 있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모두 자신만의 몫을 감당하면 그만이다. -p.53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얘기했던 고백을 나를 향해 뒤집어보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지옥이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그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나 잠들지 못했던 시간이 지나 잠들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울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지금은, 그래도 내가 누군가를 구원할 순 없어도 지옥을 선사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고 싶다. 긴 시공간 속에서 수많은 콤마 중의 하나인 인간이 이미 존재한 이상 서로에게 지옥이 되지 않기를, 내가 언제든 타인에게, 그리고 나에게 타인이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p.184

 

***

 

성미샘의 책을 읽었다. 성미샘이 살아온 인생들이 스펙트럼처럼 촤르르 펼쳐졌고, '그녀의 인생을 내가 똑같이 살았다면 나는 과연 잘 이겨낼 수 있었을까, 성미샘 정말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많은 트라우마들 속에서 이렇게 굳건히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 저자를 보며, 나도 힘을 얻는다. '저자가 이런 사람이라서 타인에게 좀 더 세심할 수 있었구나, 나도 좀 더 성숙해져야 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타인의 무지도 따뜻하게 감싸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에 나도 동감하며 읽었다. 성미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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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