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다가 짐으로 뒤덮인 방과 거실 때문에 작업방 귀퉁이 공간에서 잠을 청했다. 내 머리맡에 놓인 6개의 캔버스들. 5년전 그림인데...하며 말없이 보다가, '아! 이 쌕쌕한 색들! 이때의 나는 이렇게 색을 썼었구나!' 하며 새로운 감흥에 감싸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된 그림인데도 그림에서 쌕쌕한 색들의 에너지가 막 분출되는 것 같고.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에너지를 가지고 있나? 하는 물음이 떠오르자 '음. 됬어.'하며 체념했다. 그런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작업은 그 순간순간들과 지금까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앞으로 해야할 것들은 내가 지금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니길. 5년뒤의 내가 지금의 그림을 보고서 '많이 지쳤었지만 열심히 했구나.'라고 생각이 들면 좋겠다고. 그 정도의 바람만 가져본다. 상황이 꾸준히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일들을 수습하기에도 급하다. 나는 언제쯤 작업에 온전히 몰입하며 살 수 있을까. 더 큰 짐을 지게 되지 않을까. 막막해지면 그때는 어디로 가야할까. 익숙해지는 건 정말 무서운 것인데.
오래전 가르쳤던 제자가 불쑥 커서는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나타났다. 작업에 아주 많은 꿈과 열정을 가지고서. 그리고 몇년전 한국을 떠나 파리로 유학을 간 후배도 만났다. 그동안 못했던 작업 얘기들을 하는데, 아주 소소하고 별것아닌 얘기였을 수 있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던게 언제였지. 15년된 나의 절친을 만났다. 언제 만나도 너무 편안한 내 친구였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내 주위에. 매 순간 담아두고 싶은 것들이 있다.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연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 하루에도 열두번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작업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