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오는 새벽, 꿉꿉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감 때문인지 눈꺼풀은 너무 무겁고 온몸은 돌덩이같았지만 책을 펼쳤다. 아스테리오스 폴립. 아까워서 아껴읽던 책이었고, 지금까지는 아주 천천히 그림과 글씨를 음미하면서 읽어내려갔는데, 어제는 왠지 이책을 꼭 다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서버렸다.
난 정말 만화를 별로 읽지 않는 타입에다가 읽는다해도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 만화는 페르세폴리스 이후로 내게 큰 감흥을 안겨줬다. 어제는 새벽에 이 책의 끝 페이지를 넘기다가.....'아..............!'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응. 만화를 읽고 이렇게 마음 속 깊이 감탄을 한건 정말 오랫만인 것 같다.
산다는 것은(내가 이해한 바로는)
결국 시간의 개념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의 개념 자체를
무효로 하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제 아무리 그 대상과 멀리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그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
'지금'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건 다만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느냐의 문제일 뿐이야."
"그건 다만 얼마나 관심을 더 기울이느냐의 문제일 뿐이야."
"당신은 다만 관심을 더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거야."
"당신은 다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어."
나 자신의 이야기에선 내가 바로 주인공이지.
아스테리오스는 사람들이 왜 유일하고도 전능한 하느님을 믿는지를 자기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창조주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결국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형제는 항상 우리 조상인 그리스인의 신들을 오히려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벌어지는 즐거움과 비극의 무작위적인 사건들은 오로지 일군의 쩨쩨하고도 말다툼하는
신들의 변덕으로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난받을 만한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토록 강력하고 변덕스러운 힘이 작용함에 따라
압력이 사라지면, 누구든지 더 큰 이야기의 조연이 될 수 있다.
제 아무리 짧은 또는 부차적인 역할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발바닥에 잡힌 물집 때문에 아스테리오스가 떠올리는 컷들. 자신이 사랑했던 하나의 행동을 순간순간 50여컷으로 그렸는데 난 그 컷들이 왜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내가 제일로 사랑하는 페이지.
그리고 마지막 둘이 나란히 앉아서 여행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자고 하던 모습. 색도 예쁘고 그림도 독특하고 좋았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만화다.
이 김에 에식스 카운티도 읽어봐야겠다. 같은 미메시스 출판사 책인데 이 만화도 무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