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임을 하다가 갑자기 터진 눈물때문에 내 스스로도 주체가 안되서 화장실에서 꾸역 꾸역 눈물을 닦고,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자리로 들어갔다. 감기가 심해서 계속 코를 훌쩍 거렸기때문에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울지 않은 척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나의 바로 맞은편에 앉으신 샘이 내 눈을 계속 보시더니 내가 힘드냐 물으셨다.
실은 내가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잘 몰랐다.
내 마음과 감정이 왜 그 지점에서 작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며 터져버렸는지도.
선택에 대한 스트레스와 너무 많은 걱정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를 쥐어짰던 순간들, 나는 왜 이럴수 밖에 없을까 하는 자기 비판이 갑자기 무슨 쓰나미처럼 몰려오면서, 다시 또 터졌다. 약간의 비난조와 경멸들이 고스란히 내 작업으로 스며들면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모든게 다 나 때문이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샘께서 내게 조용히 어떤 책 한권을 추천해주셨는데, 그건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였다. 그 책을 왜 나에게 추천해주신걸까 생각하다가 책 리뷰들을 읽어보고 있으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작업과 내가 어떻게 화해를 하며 잘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야하는건 너무 중요한 일이니까.
사람은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고, 위안, 따뜻한 말, 용기 등의 다양한 말들을 건넬 수 있으면서 왜 본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쉽지 않은걸까. 남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그렇게 명확하게 말하지만 내 삶, 내 눈앞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는다. 계속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려고 노력하며 소통하고자 하지만 다시 또 쉽게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도 안되는 충고에 다시 지쳐버린다. 쉬운 판단과 추측으로 습관화되어버린 '위로와 충고'라는 말의 이기심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작업을 이어온지 14년. 그 14년 간 힘들었던 순간들은 다 말로 설명할수가 없다. 그러나 겉으로 '나 괜찮아, 응 이런것 가지고 뭐- 잊어버렸어.'라고 말하고 덮어둔 시간 또한 길었다. 여전히 힘들다 말하는 바보같은 내게, 지금껏 넌 14년 동안만 작업을 한게 아니라 더 많은 시간동안 작업을 위해 쌓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힘든거라고 말해주는 친구 수연. 작업 생각에 쪼그라든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는 친구가 있어 참 고마웠다. 그리고 몇일 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는 이쁜 아가를 낳았다. 이런 소소한 행복감이 나를 현실로 이끌어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들과 나를 온전히 믿어보도록. 땅에 발을 딛고, 눈 앞의 셀로판지를 스스로 걷어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