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르비타 숙소에서 바라보았던 풍경
제작년 인도와 네팔 여행 이후에 나는 부탄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었다. 동인도 다르질링을 가기위해 카카르비타 국경을 넘으려고 이틀정도 버스를 탔던 그 때, 동인도에서 조금만 위쪽으로 가면 보이는 부탄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져왔다. 행복지수가 굉장히 높다고 했던 그 나라의 수도 팀푸는 전 세계의 수도중에서 신호등이 하나도 없는 유일한 도시라고 한다. 난 달라이 라마와 라마교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높아져 있었고 욕심과 기대치가 낮은 삶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었다. 그랬기때문에 부탄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갔던 건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부탄을 여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한 해당 관광객의 명수를 제한했었고, 항공 문제도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렇기때문에 더욱 더 소중히 보호해야하는 그런 나라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관광객들이 드글거리지 않는 그런 유일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부탄에서는 기대치가 낮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삶과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있다. 불교의 측은지심과 비슷한 마인드 같다. 그리고 부탄의 카르마 우라는 '사람은 매일 5분씩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 생각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서구의 부자들은 죽은 시체, 새로 난 상처, 썩은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데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도 말한다. 인간은 그런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참 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삶과 죽음이 잘 융합되어있는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느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나를 이끈다면, 그 작은 확신 하나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탄에 가고싶다.
<미국에는 행복한 사람이 거의 없지만, 모두들 끊임없이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부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하지만,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나라에는 자기 성찰이 없다. 자기 계발서도 없고, 안타깝게도 실존적인 고뇌도 없다. 닥터 필(심리학을 다루는 미국 텔레비젼 프로그래믜 진행자)도 없다. 사실 이 나라 전체에 정신과 의사는 딱 하나뿐이다. 그의 이름은 필이 아니고, 슬프게도 자기 이름을 딴 텔레비젼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다.
어쩌면 플라톤이 잘못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성찰하는 삶이야말로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이미 세상을 떠난 다른 백인 남자는 이걸 다르게 표현했다. "자신이 행복한지 자문하는 순간행복이 사라진다." 이 남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게처럼' 옆으로 걸어 행복에 접근해야 한다고 믿었던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부탄은 게들의 나라일까? 아니면 국민행복지수라는 것 자체가 영리한 마케팅 책략인걸까? 몇년 전 아루바 섬이 생각해낸 슬로건처럼? "아루바로 오세요. 행복이 살고 있는 섬."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사기를 당한걸까?
그런것 같지는 않다. 먼저 부탄 사람들은 그렇게 닳아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진지해서 탈이다. 이건 훌륭한 마케팅에는 저주가 되는 특징이다. 부탄 사람들은 국민행복지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는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품이 톡톡 터지는 스마일 상징같은 행복과는 많이 다르다. 부탄 사람들에게 행복은 집단적인 노력을 뜻한다.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카르마 우라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행복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 속에 있어요.">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