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이 우리이고, 우리가 모든것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 주변의 교외이고, 쓰지 않은 책에 대한 장황한 해설이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아무도. 나는 느낄줄도, 생각할줄도, 희망할줄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쓰이지 않은 소설의 인물이므로, 하나의 현실을 가지지 못한 채 나를 완성할 수 없는 자의 꿈 사이에 있는 공간과 얇은 조각을 통과한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느낀다. 그러나 나의 사고에는 추론이 없고, 나의 감정에는 감동이 없구나! 저 위에 있는 뚜껑문에서 나는 방향없이, 연속해서, 공허하게 추락하면서 무한한 공간을 향하여 떨어지는 중이다. 나는 검은 '소용돌이'이고, 공허함 주위를 맴도는 거대한 현기증이고, 무 안의, 그리고 물속의, 아니 물이라기보다는 내가 세상에서 보고 느꼈던 이미지가 표류하는 소용돌이의 구멍 주위를 맴도는 끝없는 대양의 움직임이다. 요컨대 바닥을 알 수 없는 사악한 소용돌이 안에서 집, 얼굴, 책, 상자, 음악의 반향, 산산조각 난 목소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 바로 나는 심연이 그려내는 기하학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중심이다. 나는 무 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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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작가는 70개가 넘는 이명으로 작품활동을 했는데, 그 중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은 불안의 책이 처음이라 한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면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런 경험은 놀랍고 신기하다. 끄덕끄덕하다가 심각해졌다가 온화해졌다가 웃었다가 찡그렸다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곤했다. 그리고 밑줄을 아주 많이 그으면서 매우 천천히 읽는 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활자의 아름다움이랄까...그냥 활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그것이 그저 물리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겠지만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가 주옥같아서 더 아름다움이 증폭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우리만큼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했고, 이 작가가 만들어낸 이명의 또 다른 화자의 모습을 꾸준히 상상하곤 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정말 대단한 작가다. 나와 아주 잘 맞는 그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