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보라매 공원에 자전거를 끌고 가서 그늘에서 책 한권을 다 읽고 왔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살랑 살랑 부는 바람때문에 낙엽 그림자가 나의 몸과 얼굴 위에서 한들한들거렸다. 손바닥을 위로 펴고 나뭇잎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모양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참 귀여웠드랬다. 내가 앉은 벤치의 건너편 왼쪽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 30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우울한 얼굴로 꾸벅꾸벅 앉아 졸고 있었다. 가죽 크로스 백을 매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었는데, 근처 병원의 간병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신이 많이 지쳐보였다. 건너편의 오른쪽(그 아저씨의 옆 벤치)에는 앉아서 계속 발구르기를 하는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는데, 하도 발을 쿵쿵 구르시길래 신경이 쓰여 책을 못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팍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시더니 부는 것이었다. 나는 귀에 꼽고 있던 음악을 잠시 줄이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하모니카 연주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연주는 마치 구슬픈 아코디언을 연상케했고, 연주는 거의 수준급이었다. 내가 들어본 하모니카 중에 가장 뛰어난 테크닉과 구슬픔...그렇게 깊이 감정을 끌어올려 연주하는 건 처음봤다. 나도 모르게 발을 위아래로 흔들며 장단을 맞추었는데, 힐끔 자던 아저씨를 보니까 그 아저씨도 발을 까딱까딱하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다가 무의식중에 흔드시는 건지, 아니면 진짜 음악을 감상하고 계셨던건지. 나는 그렇게 삼각형으로 앉아있는 졸던 아저씨와 하모니카 할아버지와 내가 참 재미있는 구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딱까딱 거리며 박자를 맞추던 발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가 떠오른건 왜 였지? 아무튼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순간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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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26 하모니카 할아버지
Text2010. 6. 26.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