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2010. 7. 1. 01:13

그림의 진리와
불충(不忠)

 


강수미 (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월간미술 2010년 6월호, pp. 96-99.



 

 글을 쓴다는 것은, 저자가 존재와 사물을 정확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표현하는 일, 그렇게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주체적 영역이 전혀 아니라고 한 이는 작가 블랑쇼(Maurice Blanchot)다. 오히려 글쓰기란 저자를 자신의 언어, 사고, 감각, 의지로부터 소외시키는 절대적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러나 그런 관계가 비단 글쓰기와 저자 사이만이 아니라, 그림과 화가 간의 바로 그것이라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둘 사이는 ‘나-화가’ 주어가 ‘그린다’라는 술어를 좌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엇을’ 그린다고 하는 목적어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나를 (내 의도로부터, 나의 이미지로부터,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그런 관계이다. 예컨대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나 세잔(Paul Cézanne)의 경우에서처럼, 우리가 당연히 ‘명작’이라 인정하는 많은 그림들이 그것을 그린 당사자에게는 ‘습작’이거나 ‘실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이유, 기꺼이 ‘완성’이라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그린 이 자신에게는 정작 ‘회화라는 미지의 영역을 헤매는 경험이자 회의(doubt)’였던 이유가 거기 있다.

   화가와 그/녀의 그림이 맺고 있는 이 같은 소외,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글에서 논하려는 주제다. 즉 우리는 가능하면 온전히 화가의 측근에서, 회화의 특수한 역학(力學)을 논해 볼 것인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화가가 자기 작품/행위의 소유자 혹은 통치자가 결코 아니라는 점, 그와는 달리 그림 스스로가 행해지는 것이며, 그렇게 화가를 끊임없이 배반하면서 화가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그에 매달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진실이라는 점이다. 물론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회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한갓 ‘그림들’은 아주 오래된 관습의 표현 장르, 자기 고백이자 일상의 짧은 보고서, 환금(換金), 직업적 명성과 부의 획득, 예술적 지식의 수단으로 통용된다. 이런 상황에 화가 자신, 비평가, 큐레이터, 화상, 감상자 등 누구 하나 이의 제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가령 ‘그림의 진리’라든가 ‘회화에의 헌신’이라는 말 자체를 지극히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언설로 치부하면서, 냉혹한 현실 경제와 예술 제도를 민첩하게 내면화한지도 꽤 됐다. 심지어 화가는 이제 자신의 그림과 맺는 관계보다는 그 외적인 것들과 엮이는 관계에 골몰한다. 그 결과로 다분히 실용적이고 효율적으로 ‘잘 그린’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그림이 아니라 어떤 그림들이 우리에게 시각적 물건을 넘어 특수한 지각 상태로 다가오는 한, 모든 화가는 아니더라도 어떤 화가들이 ‘잘 그려진’ 회화를 향한 고달픈 노역에 기꺼이 지치지 않고 복종하는 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담론화할 수 있다. 그림에서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리기의 수행적 역학은 어떠한가?

 

회화, 표면이라는 형태의 진리

   화가와 그/녀의 그리기 사이를 흐르는 소외, 그 이율배반적 역학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회화의 모티프를 꼽는다면, 단연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푸코(Michel Foucault)가 벨라스케스(Diego R. Velásquez)의 <시녀들(Las Meninas)>을 두고 분석했던 것처럼, 그 경우 “화가는 자기를 담고 있는 그림에 나타나는 동시에 그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에 한꺼번에 나타날 수 없는 (...) 두 개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시성의 문지방”1)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즉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연동(連動), 재현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재현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화가의 그리기가 그림을 지배할 때 그 자신은 결코 그림에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만약 그림에 하나의 가시적 모델로 출현했다면 그 그림의 화가는 이미 재현의 지배적 질서에 수렴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화가의 자화상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양립 불가능성 말고, 그 보다 내밀하고 풀기 어려운 양립성이 어떤 화가와 그/녀의 그리기에 작동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이 요컨대 블랑쇼 식으로 말해서, ‘화가 주체의 비(非)주체적 영역으로서 그리기’이다. 사실 한 가지 스타일과 소재를 공장의 상품처럼 반복 재생산, 대량 자기 복제하는 화가들을 제외한, 모든 화가들은 이 양립 불가능한 문지방-경계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직 비가시적 상태에 있는 것(내가 그리려는 것)과 결과적으로 가시화된 것(그려진 것) 사이, 내가 그림의 주인으로서 그리는 것과 회화라는 메커니즘이 그렇게 그리도록 강제해 가는 것 사이, 나의 부재가 곧 그림의 현전으로 문턱을 넘는 그 순간들의 갈등과 노정의 역장(力場) 한 가운데서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왜 그런가? 그 원인은 회화가 오로지 표면으로만 이뤄지는 예술이기 때문인 것 같다.

   건축은 내부 구조와 외관, 기능과 파사드(facade), 설계와 장식으로 구축되며, 조각 또한 그와 비슷하다. 음악은 작곡과 연주라는 이원적 구조로 수립되고, 문학(글쓰기)도 표현과 의미의 층위가 여전히 정교하게 이중화된 상태로 형성된다. 그런데 그림은 구조가 곧 가시적 표면이며, 그리는 행위가 곧 그림의 출현이고, 표현이 곧 의미 자체인 예술 영역이다. 이것이 아마 회화의 특수성, 회화의 진실일 텐데, 이에 대해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다음과 같이 썼다. “회화에서의 진리는 (...) 우리 안에서 매개, 가장, 가면, 또는 베일 없이 회복되는(restored)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하고,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그는 바로 인접한 곳에서 이렇게 다시 정의한다. “회화에서의 진리는 그것[회화]의 초상 안에서 그 형질 하나하나가 충실하게 표상된 진리를 의미하고,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2) 이를테면 회화만의 특수한 진리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진리는 다른 무엇에 대한 진리도 아니고, 다른 무엇에 의해 중계되거나 덧씌워지거나 은폐된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 진리란, 그리기(painting)라는 행위의 자기 모습 안에서 매순간, 구체적으로 알알이 실현-표상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화가들이 왜 그토록 붓질 하나에도 긴장하며, 왜 그토록 자주 자기 그림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서서 그리다가 또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서 보는 왕복운동을 반복하는지를 설명할 길은 여기 있을지 모른다. 또한 왜 그토록 개념이나 논리보다는 그리는 순간의 감각과, 그 모호하고 객관화하기 힘든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테크닉에 연연해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이 맥락에 있을 것이다. 즉 회화는 표면만으로 존재하고, 그 표면에서 모든 창작과 향유가, 모든 외적 형식과 내적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표면은 내부와 외부라는 철학적 이원 구조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모더니즘 회화의 순수하고 유일한 정체성으로 규정한 ‘평면성(flatness)’과도 다르다. 회화가 표면의 예술이라는 정의는, 이 예술이 깊이를 추구하더라도 그 깊이가 가시적 표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평면성은 한 특정 시대, 사회 조건 속의 회화 조류를 위해 상정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미술 개념이라는 점에서, 회화 일반의 진리로서 그리기의 표면보다 한정적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가령 에나멜페인트를 캔버스 천위에 흩뿌림으로써 문자 그대로 회화의 평면성을 달성한 폴락(Jackson Pollock)조차도 그 예술적 무/의도, 비/의지의 실현이, 당시 록웰(Norman Rockwell)의 대중잡지(Saturday Evening Post) 삽화가 그런 것처럼, 바로 그림 위에서 이뤄진 것이지 다른 어디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표면이다.

   그럼, 이 표면이라는 문제를 이제 다시 화가가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소외되는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자. 그림은 근본적으로 그리기라는 수행(performance) 자체이며, 그 수행의 시작, 전개, 완결과 그림의 향유라는 전 과정이 불가피하게 거기서만 일어나는 장소(표면)라 할 때 ―이런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한 영역이 바로 동양화인데―, 화가의 어떤 창조적 행위나 자율적 의식도 그 운동의 메커니즘과 틀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먼저 그은 선은 다음에 그어지는 선을 조건화하고, 이번에 가한 한 획 및 붓 터치는 그 이전의 화면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애초 머릿속에 구상했던 화면의 구도는 정작 그림의 공간에 실현되면서 다른 것으로 가시화되고, 그리려 했던 주제는 선과 면과 형태와 색채의 결합 혹은 상상력의 이미지와 물질(그림의 질료) 간의 갈등 속에서 이질적인 상태로 실현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한 화가의 제작 과정만을 상상적으로 가정하고 그려본 광경이다. 하지만 태초의 화가가 아닌 이상, 모든 역사적 시간 속의 화가는 이와 같이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소외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누적된 이미지의 보고(寶庫), 회화의 틀과 문법, 양식과 기법에 의해서 자기 그림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이 위축되는 상황을 경험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이미 내 텅 빈 캔버스를 온갖 형상들이, 시각 질서가, 미적인 특질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가시화하기 위해 애쓴다. 이렇게 기존 회화에 대한 불가피한 뒤따름, 노예적인 애씀을 끊어버리는 일이, 화가에게는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이 창조되는 순간이고 위대한 예술가의 자유가 확보되는 단계다. 바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리히터(Rerhard Richter)는 “당신이 그림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즉 색, 구성, 공간과 당신이 이전에 알았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화가의 “자유”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이, 그로 하여금 역설적으로 화가의 주관과 직관을 배제한 채 사진을 완벽하게 베껴 그리고, 추상화를 곧이곧대로 구상적 요소로 분해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사실 대가 리히터만이 아니다. 예컨대 크레파스로 정신없이 둥근 원만 그려놓고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고 말하는 어린아이, 자신이 뭘 그려야할지 모르겠음에도 불구하고 하얗게 비어있는 화판 또는 캔버스 앞을 떠나지 않고 시간을 견뎌내는 작가 지망 대학원생, 화가 이력 이십여 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정적이거나 정적이거나 영속적인 이미지’3)를 지연시키며 회화의 세계를 우회하는 중견 작가. 이 모두가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장(場)이 아니라, 그/녀를 자신의 창작 의도로부터, 소유격으로서의 자기 그림으로부터 순간순간 몰아내는 역학 장에서, 그 소외를 견디며 체류하는 자이다. 이렇게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중첩하며 함께 작동하는 표면, 그리고 그 표면 속에서의 끝이 안 보이는 체류가 내 생각에는 회화에서의 진리다. 동시에 화가에 대한 그림의 불충(不忠)이다.

 

매혹하는 껍질 혹은 세련된 날 것

   서양미술사에 한정해 돌이켜보건대, 그림은 자연과 세계에 대한 모방(mimesis), 눈속임(trompe l'oeil), 환영(illusion), 장관(spectacle)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도정의 최종 완성은 ‘한 폭의 그림 같은(picturesque)’이라는 언어 표현에서 보듯, 앞서의 관계를 전도시켜 세계가 그림을 따라 지각되거나 미적으로 판단되는 단계였다. 간단히 말해, 역사는 화가가 대자연의 뜨는 태양을 따라 그리던 단계에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며 ‘그림 같다’고 감탄하는 단계로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현실의 모방도 없이, 비유적 대상으로 삼을 세계도 없이 그림 이미지가 환유적으로, 파생 실재(hyper-real)로, 크나 큰 권태 속에서 윤전(輪轉)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런 시대의 그림은 더 이상 화가를 자신의 타자로서 소외시킴으로써, 기존의 회화와 생산적으로 충돌하고, 생활세계의 습관적으로 길들여진 지각과 불화하는 낯선 그림을 그려내도록 담금질할 수 없다. 화가에게 불충함으로써, 화가를 답 없는 자유에 체재하도록 충동질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제 그림은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른 생산과 전시와 소유의 유통 경로를 관통하며, 무성 생식하는 아메바처럼 자기 복제와 자가 증식을 거듭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상이 됐다. 21세기 들어 약 10년, 특히 세계 미술 시장이 엄청난 호황을 영위한 2003-2008년의 기간 동안 갤러리로, 경매장으로, 페어로 쏟아져 나온 반짝이는 그림들이 우리의 눈을 ‘매혹하는 껍질이자, 세련된 날 것’인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는다. 거대서사, 사회정치적 의식, 여성주의,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를 내부에 담았다고 선전하는, 그러나 패션잡지의 화보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껍질이 전부인 그림들. 작가만의 독특한 일상에 대한 고백과 아기자기한 개인적 상상력이 담겨있다고 감상자를 유혹하지만, 정작 그렇다면 이 세대 내 모든 작가가 거의 일란성 쌍둥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의심해야할 정도로 똑같은 감수성과 주관적 경험의 기표 상태 그림들. 그 ‘내부’가 있다는 약속이 오늘 우리 옆의 그림을 표면이 아니라 단지 껍질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그 매끈한 매만짐이 너무나 대중문화와 상품세계를 직접적으로 표절한 결과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아주 많은 그림을 미분화된 아메바의 분홍색 기관들처럼 날 것으로 보이게 한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워홀(Andy Warhol)이 대중문화이미지를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반복한 그림들에 대해, 고대 그리스 이래로 ‘유일무이성’을 숭배해온 서구 주체들은 거기서 “모험이 배제된 세계의 덧없음”을 느낀다고 썼다. 그 뜻은, 말하자면 더 이상 새로움, 창조, 생성의 모험이 가능하지 않은 세계의 상태, 심지어 그런 지루한 반복의 상태를 끝낼 강렬한 죽음/종말/단절도 주어지지 않은 덧없는 삶의 상태를 워홀의 그림에서 지각한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바르트의 시각에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그런 세계는 바르트의 그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 도래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우리 감각에는 ‘모험을 상실하거나 뺏겨버린 데 대한 덧없음 혹은 허무함’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림들을 그려대고, 그것을 전시하고, 보고, 소유하면 미술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적 모험을 상실한 세계, 그 모험이 하잘 것 없으며, 게다가 그런 것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내몰린 세계에서도 그림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그 허약하지만 질긴 생존이 바로 지금 여기의 그림들을 보다 세련되고, 보다 광휘로 번득이는 무엇으로 변모시켰다는 사실은 기이하다.

   어쩌면 ‘그림에의 헌신’, 동시에 ‘그려지는 그림에 맞서 매번 각성된 지각으로 그림 그리기’ 같은 수행적 회화의 세계는 이제 불가능할지 모른다.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글로벌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강제하는 것은 ‘경제 공동 운명체’이거나 여하한 경우의 ‘연대 책임’인데, 여기서 예술이라고, 회화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부터 그림은 그 기능과 값어치가 애매했던 만큼이나, 더욱 더 명료하고 단단하며 확고한 정체성 만들기에 주력할 수도 있다. 명품 상품보다 더 상품다운 소위 ‘명화’, 명품보다 더 반짝거리고 달콤하며 잔혹 취미도 충족시켜주는 특수한 사물로서. 이것이 아니라면 밴스키(Banski)처럼 익명적이고, 도시 게릴라적이며, 반(反)자본주의적인 그리기가 대안일까? 그런데 그의 스텐실 그래피티(graffiti)는 자본과 명성과 권위 중심의 미술계 구조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곳의 컬렉션 목록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지금 여기, 불충한 측은 그림이 아니라 우리다.


주)
1.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이광래 역, 『말과 사물』, 서울: 민음사, 1997, p. 26.
2. Jacques Derrida, The Truth in Painting, Geoff Bennington and Ian McLeod(trans.),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p. 5.
3. 미쳴은 ‘적절한 이미지’에 대한 세간의 믿음과는 반대로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에서도 안정적이거나 정적이거나 영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편으로 ‘적절한’이라는 가치 평가의 임의성과 비객관성을 지적하는 말인 동시에 그만큼 이미지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W. J. T. Mitchell,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임산 역,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 서울: 시지락, 2005, p.27.



출처 : http://desumi.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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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