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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24 굴과 아이
books2015. 4. 24. 09:22

망한 그림

1
모든 작가들이 선망하는 그런 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 그 전시 공간에 대한 선입견이 부퓰려진 만큼 작품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지금 현재의 내 상태보다 나아 보이고 싶은 욕심이 나서 그림의 스케일이나 소재를 잘못 결정하게 되기도 한다. 이래야 할 것 같은 마음,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면서 그림을 그리는 본래의 동기는 오염되기 시작한다.
어떤 대상을 그릴 때 내가 흥미를 가진 사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하고 그럴듯한 대상을 선택하고 그리기 시작하면 없던 흥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가지 사족이 붙고, 뭔가 설정이나 불필요한 개념같은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국 참고 그리면 그림을 완성하긴 해도 동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불확실해서 그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2
오랜 시간 뜸을 들이다가 더 좋은 것을 그리려고 하다보면 마음이 너무 소심해져서 겁먹은 상태가 된다. 이때는 빈 종이에 작은 티끌 하나만 보여도 신경이 쓰인다. 망칠까봐 이미 겁먹은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그저 그림을 보고 비난할 사람들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망칠까 두려운 마음은 아주 정성 들여 그려야 한다는 강박으로 연결되어,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상태가 되고 만다. 그렇게 그린 그림에는 나약한 지루함이 흐른다. 그 에너지가 너무 약하고 확신이 없어서, 결국 그 그림을 완성할 만한 에너지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못내 시들어버린다.

3
그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그리는 나도 모를 때, 그림은 정말 이도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그리는 에너지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평평한 하나의 물건으로 변모한다. 정말 그 물건은 지구상에서는 쓸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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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