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2023. 8. 14. 10:49

-먼지 구름이 가라앉으면 보이는 우리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겠지. 그러나 서로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늘 기다리는 사람들이겠지.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상대를 다치게 하고, 자기도 다치는 사람들이겠지. 차라리 입을 다물까. 집이든 몸이든 뭐든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떠들라 하고 우리는 이렇게 아이차럼 장난이나 치며 살까. 하지만 자꾸 울고 싶은 일이 생기는 걸 어쩌나. 어떻게 막을 수 있나.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사건이 우리 가슴에 유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소매가 엉킨 채로 함께 걸어갈 것이다. p.83

-같이 살자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자주 보자는 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저 너무 어딘가와 이곳 어딘가의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우리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었다. 우정의 색깔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랑이 하나의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너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왜 너에게 이해심을 요구할까. 그냥 이대로도 우리는 잘 지내는데.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기숙사와 월세방을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언제쯤 어디에 발을 내릴지 모른다는 것은. 일단 발을 내려야 그다음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p.121

-한동안 술잔만 비워내던 언니가 말했다. 선생님, 청춘이 아름다운 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세상을 시시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예요. 그 시기가 지나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공포로 다가와요. 제가 지금 그래요. 모든게 공포예요.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경희야, 너는 지금도 청춘이야. 세상을 계속 시시하게 봐도 돼.

선생님은 늙었어요. 맞아 난 늙었어. 근데 안 늙었어요. 그래. 아직 안 늙었어.

선생님, 앞으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자한테 절대로 재능있다는 말은 하지 마시라고요. p.175

-가끔 드라마 속 인물이 부러워. 모두가 기억해주는 삶을 살잖아. 가짜인데 그런 삶을 살아. 나는 진짜인데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원하는 건 기념비처럼 우뚝 일어선 삶이었을까. 모두가 돌이보며 감탄하고 기다리는 삶이었을까. 언니도 알겠지만 그런 삶은 누군가의 희생이 가려지는 삶이잖아. 전쟁이 무서운 게 그런거잖아.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몰지각. 누군가의 피해를 부수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반지성. 그렇게 지킨 영토와 신념은 후대에 전해져 이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곳의 기념비로 남잖아. 그러니까 언니도 다시 생각해봐. 언니의 삶에 기념비를 우뚝 세우고 싶은지. 언니의 청춘과 슬픔과 기쁨을 그 아래에 묻어두고, 단 하나의 비를 세우고 싶은지. 그러는 동안 언니가 잃어버릴 것들을 생각해봐. 언니는 내 말을 묵묵히 듣더니, 사람마다 세우고 싶은 단 하나의 비가 있어, 라고 단정짓듯 말했다. 나는 그런게 없는 사람도 많다고 답했다. 이젠 그런 시대야. 기념비를 세우는 게 촌스러워진 시대. 단 하나의 기념비가 아니라 요리조리 상황을 살피면서 끼니를 이어가는, 자기 몸 하나 누일 곳을 확장해가는 그런 삶이라고. 우리는 순간을 살고 미래는 여기 없지만, 미래를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어. 그래서 다들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고, 직업을 갖는 거야. 자기 만족 본위의 직업이 아니라 월급 만족 본위의 직업을. 언니 인생의 우선순위는 거꾸로 세운 기념비처럼 괴상해. p.192

 

***

난 이서수 작가의 책 <엄마를 절에 버리러>를 먼저 읽고 나서 이번에 <젊은 근희의 행진>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30대의 내 삶이 너무 떠올라서 정말 뼈 때리고 현실에 후려맞는 느낌이 들었다. 살면서 후회는 절대 안하겠다 다짐하지만 그런건 별로 없는것 같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것들은 여전히 미궁에 쌓여 있으면서 자꾸만 물음표를 남긴다. 너무 좋아했지만 너무 싫어진 사람, 끝내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말 한마디에 판단되어지는 상황들, 자꾸만 울고 싶은 일이 생기고 나혼자선 막을 수 없던 날들,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애늙은이처럼 살기도 싫어서 발악하던 때, 감정을 조심스레 다루지 못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던 날들, 여전히 바뀌지 않던 미래, 습관처럼 되내이던 주문같은 외침들, 발을 딛고 살아야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참새처럼 살았던 내가 보인다. 막 머리통을 휘갈기는 느낌이어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는 중이다. 특히 자매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너무 현실적이고 놀랍다. 다음 책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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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