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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7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books2012. 10. 17. 18:28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깊은 사색적 주의의 거장이었던 폴 세잔은 언젠가 사물의 향기도 수 있노라고 말한 바 있다...(중략)...오직 깊은 주의만이 "눈의 부산한 움직임"을 중단시키고 "제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연의 손을 묶어둘" 수 있는 집중 상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색적 집중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면 시선은 그저 불안하게 헤매기만 할 뿐, 아무것도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중략)...예속과 기투(하이데거의 용어, 독일어 계획, 구상, 초고로 번역됨)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21세기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

 

피로사회를 읽다보니...중반쯤부터 재미있어진다. 그런데 다 읽고나니 우울하다. 피로사회 챕터 다음에는 우울사회가 나오는데, 어쩔 수 없이 자아를 상실한 목적도 없고 공허함만 남은 인간을 호모 사케르에 비유한다. 가해자이면서 희생자이고 주인이자 노예가 되고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이 사회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이란. 이상적 가치를 잃어버린 자아는 무조건 건강을 위한 삶을 찬양한다. 아무런 목표의식 없이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마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씁쓸한 결론이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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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un